거짓과 과장에 맞선 ‘페넬로페 생존법’[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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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앙투안 부르델의 ‘페넬로페’(1907년). 페넬로페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에밀 앙투안 부르델의 ‘페넬로페’(1907년). 페넬로페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의심하는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나 좀체 환영받지 못한다. 힘을 보태도 모자랄 판에 의심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니 걸리적거리는 훼방꾼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철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철학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 배후의 숨은 진리를 찾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 의심이 도대체 사는 데 무슨 소용이 있나?’ 자신 있는 행동가들은 가르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신과 더 대담한 행동이다.’ 페넬로페의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다르다.》

거지 모습의 오디세우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페넬로페와 구혼자들’(1912년). 페넬로페는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에는 푸는 일을 했다. 
이는 구혼자들의 구애를 거절하며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수의 짜기는 페넬로페의 노동과 지혜를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제공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페넬로페와 구혼자들’(1912년). 페넬로페는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에는 푸는 일을 했다. 이는 구혼자들의 구애를 거절하며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수의 짜기는 페넬로페의 노동과 지혜를 상징한다. 위키피디아 제공
남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아로 떠날 때 페넬로페는 젊은 신부였다. 막 옹알이를 시작한 갓난아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아이가 스무 살이 되어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도, 모험 속 바닷길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스무 해는 페넬로페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다. 남편이 떠난 지 17년째 되던 해부터 집으로 몰려와 그녀를 닦달한 구혼자들만이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구혼자들보다 페넬로페를 더 괴롭힌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남편의 생사와 함께 자신의 미래도 오리무중이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나그네들의 말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식객들이 남편에 대한 뜬소문으로 귀를 사로잡고 사라졌던가? 그들은 며칠 동안 대접을 받기 위해 거짓과 과장을 뒤섞어 이야기를 꾸며댔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페넬로페에게 지혜가 생겼다. 의심과 질문의 능력이었다.

페넬로페의 지혜는 돌아온 남편의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장면은 긴 ‘오디세이아’의 클라이맥스다.

어느 날 집에 나타난 거지가 모든 상황을 바꿔 놓았다. 정체불명의 사내는 활쏘기 경기에서 구혼자들을 제압했다. 그는 과녁을 꿰뚫고 구혼자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것은 활의 주인뿐이었다. 그러니 거지는 오디세우스일 수밖에. 유모는 내실로 뛰어들어 왕의 귀환을 알리지만 안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 신들이 당신을 실성케 하셨군요.” 페넬로페는 유모의 말을 의심한다.

남편을 보고서도 그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초라한 몰골 탓이었을까? 페넬로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오디세우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어머니, 무정한 어머니, 마음이 돌덩이 같으세요. 어째서 이렇듯 아버지를 멀리하시는 건가요?” 부부의 기이한 만남을 지켜보며 아들이 어머니를 나무랄 정도다. “온갖 역경을 견디고 이십 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온 남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이렇게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가진 여인은 달리 없을 거예요.”
의심하는 페넬로페
페넬로페의 반신반의는 오디세우스의 행색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번듯한 모습을 보인 뒤에도 그녀는 남편을 시험하면서 “둘만 알고 있는 증거”를 찾는다. 그녀의 무심함에 인내심 많은 오디세우스도 맥이 풀려 체념할 정도다. “자, 아주머니, 내게 침상을 펴주시오. 혼자서라도 잠들 수 있도록. 저 여인의 가슴에는 무쇠 같은 마음이 들어 있으니까요.” 무정한 여인도 물러서지 않는다. “에우뤼클레이아! 그이가 직접 만든 우리의 훌륭한 침실 밖으로 튼튼한 침상을 펴주세요.”

너무하지 않나? 눈앞에 서 있는 남편의 존재를 믿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의 페넬로페는 증거를 찾아 진실을 밝히는 명탐정이자 철학자이다. 철학자들은 뻔한 것도 의심한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맞나? ‘1+1=2’가 맞나? 남편의 정체를 의심하는 페넬로페처럼 철학자들은 당연해 보이는 진리도 의심한다. 그런 의심에는 이유가 있다. 평면이 아닌 곡면 위에서도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인가? 어떤 악령이 ‘1+1=2’라고 믿도록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속인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철학자의 의심이 의심을 위한 의심은 아니다. 더 확실한 진리를 찾는 것이 의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변증술’이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두 그런 의심과 질문의 기술이었다.

남편에게 침상을 마련해주라는 페넬로페의 당부도 그런 ‘방법적 회의’의 일부였다. 그것은 눈앞에 서 있는 남편이 진짜 남편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으니까. 침상을 밖에 내놓으라는 말에, 참고 있던 오디세우스가 벌컥 화를 낸다. “누가 내 침상을 다른 데로 옮겼소?” 절망적 심정으로 내뱉은 오디세우스의 말 한마디, 바로 그 한마디가 페넬로페가 찾던 증거였다. 신방의 침상 기둥이 땅에 박힌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둘뿐이었으니까. 그런 침상을 밖으로 들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제야 냉정한 페넬로페도 무릎과 심장이 풀렸고 달려가 남편의 목을 끌어안는다. “오디세우스, 내게 역정 내지 마세요. (중략) 내가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환대하지 않았다고 화내지도, 노여워하지도 마세요. 어떤 사람이 찾아와 거짓말로 나를 속이지 않을까 내 가슴속 마음은 언제나 떨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이득을 꾀하니까요.”

사악한 이득 노리는 세력
사악한 이득을 꾀하는 자들이 페넬로페의 주변에만 있었을까? 우리의 삶과 소신을 위협하는 거짓과 과장은 사기꾼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십 년 누적된 문제를 4, 5년의 임기 동안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가들의 큰소리도 과장이거나 거짓이다. 페넬로페의 집에서 4, 5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난 나그네들의 흰소리와 다를 바 없는 ‘공약’(空約)이다. 수십 년간 키르케의 주문처럼 우리를 사로잡은 성장과 발전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이 나라에 왜 분노와 갈등은 점점 더 쌓여 가는가? 기술의 발달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그와 함께 또 얼마나 많은 속임수가 생겨났나? 알고리즘 조작, 딥페이크, 심 스와핑…. 이름도 생소한 사기 수법들이 소비를 부추기는 과장 광고와 합쳐져 우리를 속인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를 일컬어 ‘탈진실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의심, 세상 바꾸는 첫걸음
이렇듯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의심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든 묻고 따지고 시험해 보자. 세상을 불신하고 타인을 믿지 못해 의심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페넬로페의 의심이 그랬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그랬듯이. ‘오디세이아’ 이후 2800년이 지났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의심 없이 내디딘 열 걸음보다 의심과 함께 내딛는 한 걸음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수 있다. 잘 의심하고 잘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도 의심에서 시작한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페넬로페#페넬로페 생존법#의심#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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