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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글로벌 이슈/하정민]‘레드 타이드’보다 더 붉은 ‘핑크 타이드’

입력 2021-12-29 03:00업데이트 2021-12-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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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당선인이 24일(현지 시간) 수도 산티아고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 등록금 철폐 시위를 주도한 그는 대선 과정에서 “칠레에서 신자유주의를 몰아내겠다”며 복지 확대, 노동시간 감소, 환경 보호 등을 내세웠다. 사진 출처 보리치 당선인 트위터
하정민 국제부 차장
2004년 우루과이 대선에서 좌파연합 후보인 의사 출신의 타바레 바스케스가 승리했다. 건국 후 첫 좌파 대통령이 탄생하자 당시 이를 취재하던 미국 뉴욕타임스의 래리 로터 기자가 ‘핑크 타이드(Pink Tide)’란 용어를 처음 썼다. 좌파지만 바스케스의 정책과 성향이 극단적이지 않으며 강렬한 빨간색이 상징인 동구권 사회주의보다 온건한 분홍빛 사회주의가 나타날 것이란 의미에서였다. 이후 중남미 곳곳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하자 ‘온건 사회주의의 유행’을 뜻하는 핑크 타이드란 용어 역시 널리 퍼졌다.

핑크 타이드를 가능케 한 핵심은 선심성 복지 정책이다. 베네수엘라(원유) 브라질(철광석) 칠레(구리) 등 주요국은 모두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했다. 2000년대 중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세계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이들은 자원 수출로 번 돈을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저가주택 공급에 쏟아부었다. 음식과 생필품 가격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했다. 국민들 또한 열광했다.

2010년대 들어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지만 핵심 지지층인 저소득층의 반발을 우려해 호황 때 설계된 공공 지출과 복지를 줄이지 않았다. 좌파 지도자의 부정부패 또한 우파에 버금갔다. 물가가 치솟고 나라 재정이 파탄나자 민심이 돌아섰다. 2015년 아르헨티나, 2018년 칠레와 브라질 대선에서 모두 우파 후보가 당선됐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ABC(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3개국에서 모두 우파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핑크 타이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전대미문의 전염병 대유행으로 취약계층이 큰 피해를 입자 복지 확대 구호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6월 페루, 11월 온두라스, 이달 19일 칠레 대선에서 속속 좌파 후보가 승리한 것이 그 증거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세 사람은 모두 강경 진보정책을 주창하고 있다.

문제는 돈이다. 셋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3월 취임하면 환경을 파괴하는 광업 개발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광업이 국가총생산(GDP)의 10%임을 간과했을 뿐 아니라 환경 파괴가 전혀 없는 광업 개발은 애초부터 형용모순에 가깝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학자금 대출 탕감, 민영 연금의 공영화 등 그의 공약은 하나같이 천문학적 재원을 필요로 한다. 약자를 지원하자는 취지는 좋으나 국가 경제의 근간인 광업을 사실상 포기한다면 이에 필요한 돈을 어디서 조달할까.

각각 내년 5월과 10월 대선을 치르는 콜롬비아와 브라질에서도 좌파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특히 중남미 최대 경제대국 브라질에선 집권 중 부패로 퇴임 후 감옥신세까지 졌던 ‘좌파 거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재직 시 ‘보우사 파밀리아’(빈민층 현금 지급) ‘포미 제루’(기아 제로) 등의 무상 복지에 예산의 약 75%를 투입한 인물이다.

이런 상황을 보노라면 이제 핑크 타이드가 ‘원조’를 넘어 더 붉어진 느낌마저 든다.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옛 소련은 사유재산을 죄악시했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집단농장 같은 실험을 벌였지만 결과는 처참했고 소련 또한 무너졌다. 옛 소련을 추종했던 동유럽 각국 또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유럽연합(EU)에 가입하거나 가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레드 타이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도 유독 중남미에서만 핑크 타이드가 맹위를 떨치는 현상 뒤에는 각국 군사독재 정권의 오랜 민주화 탄압 역사 등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과 원자재 대체 산업을 키우려는 노력 없는 무상 복지 또한 일종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보조금의 단맛에 길들여진 국민 역시 갈수록 구조조정을 비롯한 허리띠 졸라매기를 거부할 것이 뻔하다. 똑같이 무능한 좌우파가 번갈아 가며 집권하다 양극화, 부패, 정치 불신 등만 심화하는 모습이 중남미만의 일도 아닌 듯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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