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신광영]거대한 체스판에 갇힌 우크라이나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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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국제부 차장
신광영 국제부 차장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러시아의 통치에 짓눌린 소비에트연방 민초들의 생생한 증언을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담았다. 이 책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폐허가 된 마을에 살았던 한 12세 소녀가 나온다.

“나는 집에만 있어요. 우리 반 애들이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아냈을 때, 내 옆에 안 앉으려 했어요. 나한테 닿을까 봐 무서워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그래도 난 아빠가 아주 좋아요.”

재앙이 벌어지면 아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비극을 맞는다. 러시아의 침공 우려로 전운이 감도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7년째 내전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지 곳곳에는 저격수와 지뢰를 경고하는 표지판이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지뢰 피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곳의 16세 여학생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한) 2014년에 여동생이 태어났어요. 저도 무서웠지만 그 갓난아기가 너무 걱정됐어요. 이제 다시 포격과 총성이 들려와 그때가 자꾸 떠올라요. 우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동생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2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시민들이 1932∼1933년 옛 소련의 식량 징발로 인한 대기근 ‘홀로도모르(기아 학살)’로 굶어 죽은 수백만 명을 추모하며 조각상 앞에 꽃과 우크라이나 국기 등을 올려놓았다. 키예프=AP 뉴시스
지난해 11월 27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시민들이 1932∼1933년 옛 소련의 식량 징발로 인한 대기근 ‘홀로도모르(기아 학살)’로 굶어 죽은 수백만 명을 추모하며 조각상 앞에 꽃과 우크라이나 국기 등을 올려놓았다. 키예프=AP 뉴시스
같은 마을에 사는 80대 노부부는 말한다. “우리는 문맹인데, 제2차 세계대전과 1947년 소련 대기근에서도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매일 밤 잠들기 전 기도하고, 살아서 행복하니까 아침에 다시 기도합니다.” 89번째 생일을 앞둔 이웃집 할머니는 “요즘 밤마다 지붕 위로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잠이 안 온다. 내 인생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땅이 넓고 비옥해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하지만 동시에 강대국들의 화약고라는 숙명을 안고 있다. 유럽 열강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고, 러시아엔 흑해와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다. 폴란드에 이어 독일, 그러곤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체르노빌 참사 이전에도 1930년대 스탈린이 집단농업을 추진하며 우크라이나를 수탈해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홀로도모르(기아 학살)’가 자행됐다.

지난해 12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모스크바에 있는 군사장비 전시장에서 저격용 소총을 든 채 살펴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 옆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추진과 관련해 우크라이나의 서방 밀착,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견제가 계속되면 군사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AP 뉴시스
지난해 12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모스크바에 있는 군사장비 전시장에서 저격용 소총을 든 채 살펴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 옆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추진과 관련해 우크라이나의 서방 밀착,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견제가 계속되면 군사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AP 뉴시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후에도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하면서’ 30여 년을 보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계속 손아귀에 쥔 채 서방과의 안보 완충지대로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 등 경제·군사적 목줄을 쥐고 친러 인사를 대통령에 앉혀 장악력을 유지했다. 그럴수록 우크라이나에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러시아와의 악연을 끊어내려는 여론이 거세졌다.

‘친러’와 ‘친서방’ 대통령이 교차 집권하며 각각의 지지 기반이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는 분열됐다. 친러 정권이 서구화 열망을 억압할 땐 오렌지 혁명(2004년), 유로마이단 혁명(2014년) 같은 시민 저항이 뒤따랐다.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 정권이 붕괴하자 러시아는 곧바로 우크라이나 남단의 크림반도를 빼앗은 뒤 러시아계가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지원하며 분열을 부추겼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이 해리 트루먼 항공모함(사진) 전단을 지중해에 대기하도록 했다고 지난해 12월 28일 AP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이 해리 트루먼 항공모함(사진) 전단을 지중해에 대기하도록 했다고 지난해 12월 28일 AP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경에는 10만 명이 넘는 러시아군이 집결해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EU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불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토가 코앞까지 동진해 오는 것은 좌시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등 원거리 개입을 줄이고 있고, 대만을 두고 중국과의 각축전에 주력하고 있어 좋은 기회라고 본 것 같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하는 EU 국가들 역시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형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12월 7일 워싱턴 백악관 상황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화상을 통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회담에는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이 배석했다. 푸틴 대통령(왼쪽 화면)은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 소치의 대통령관저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이날 121분간 이어진 회담에서 두 정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워싱턴=AP 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12월 7일 워싱턴 백악관 상황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화상을 통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회담에는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이 배석했다. 푸틴 대통령(왼쪽 화면)은 러시아 남부 휴양도시 소치의 대통령관저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이날 121분간 이어진 회담에서 두 정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워싱턴=AP 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시 경제 제재 등 초강경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미국으로선 군사 개입까지 하기엔 부담이 크고, 가만 놔두자니 중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고심하고 있다.

나라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친러와 친서방 간의 분열이 극심해 국회의원들이 난투극을 자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2019년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현재 국가정보국장과 안보보좌관 등 안보 컨트롤타워를 그의 개그맨 동료들이 맡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거대한 체스판’에 갇힌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처지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미소 냉전의 최전방이었고, 이제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선 우리와 겹쳐지는 대목이 적지 않아서다. 그들의 오랜 시련이 이제는 끝나기를 바라지만 우크라이나의 1월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할 듯하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우크라이나#거대한 체스판#화약고#한국#미소 냉전#미중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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