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용관]대전환의 난세, ‘위임 정치’로만 되겠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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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논란, 전두환 인용 문제만은 아니다
위임하되 위임 않는 고도의 리더십 절실

정용관 논설위원
정용관 논설위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위임의 정치’라는 말을 했다. 전두환 얘기를 다시 꺼내려는 건 아니다. 전두환은 싹 걷어내고, 그가 말하는 위임의 정치란 게 뭔지 타당한 건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발언 전문을 보면 우선 솔직하다. “국정이 굉장히 어렵다는데, 경제권력 정치권력 수사하면서 조금 아는 거 가지고 할 수 있겠느냐.” 또 화끈하다. “저는 시스템 관리나 하면서 법과 상식이 짓밟힌, 이것만 딱 바로잡고….” 요컨대 잘 모르는 건 최고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공을 살려 ‘진보정권의 신적폐 청산’ ‘부패와의 전쟁’ 등 공정과 법치를 직접 챙기겠다는 논리다.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취지는 알겠다. 대통령이 되면 최고 인재를 등용하고 적재적소 인사를 하고 권한을 위임하고 시스템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생각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그 정도만으로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아가 윤 전 총장의 긴 발언에서 “정치 대충 그렇게 하면 되는 것 아냐” 하는 지나친 자신감이 느껴져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최고 권력자가 만기친람하고 모든 걸 좌지우지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위임의 정치는 맞는 방향이다. 특정 현안에 대한 개인 생각을 섣불리 드러내는 걸 삼가는 게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탈원전 등 대통령의 개인 소신이 일선 부처의 정책 수립 과정을 왜곡하고, 요직을 꿰찬 얼치기 전문가들에 의해 부동산 등 민생이 망가지는 사례를 우린 여러 차례 목도했다.

다만 위임의 정치는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청와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의 구조적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당장 그가 말하는 위임의 정치에선 청와대와 내각, 수석과 장관의 미묘한 역학관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복잡한 주요 정책 사안을 놓고 실세 수석과 장관의 의견이 충돌하면 어찌할 건가. 대통령이 아니면 누가 조율하고 최종 판단을 내릴 것인가. 자신은 잘 모르고 다 챙길 시간도 없으니 경제든 외교든 전문가에게 맡기겠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그건 권위주의 시절의 편의적 ‘위임 통치’에 가깝다.

바야흐로 대전환의 난세다. 미중 패권 경쟁은 과거 탈냉전 시기 국제질서 변동에 버금갈 정도의 국가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산업 인프라 구축 등 지원만 하고 기업 활동은 간섭하지 않는 게 상책일 수 있지만 극심한 취업난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 마련 및 사회적 합의 도출은 대통령 몫이다. 노동 개혁, 연금 개혁 등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뒤엉킨 난제의 실타래도 풀어야 한다. 남다른 통찰력을 갖고 ‘위임하되 위임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란 얘기다. 어쩌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신의 경지’를 요구받는 치명적인 자리일지도 모른다.

여당에 이어 야당 대선 후보도 곧 확정된다. 국민들까지 나서 정권교체냐 아니냐의 4개월 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누가 잡아도 나라는 시끄러울 것”이라고 걱정을 키울 것이다. 윤 전 총장은 정치에 입문한 지 4개월 됐다. 여러 말실수 등 좌충우돌하며 지지율 등락이 있었음에도 야권의 유력 주자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배짱(guts)도 보여줬지만 정권교체 프레임에서 맴돌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어제 그는 “오늘 윤석열은 부족하지만, 내일 윤석열은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인 윤석열의 1차 운명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윤석열#위임의 정치#대전환의 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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