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죽음과 순간의 진심[클래식의 품격/나성인의 같이 들으실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사진)는 바그너를 잇는 독일 악극의 대가다. 그의 아버지는 뮌헨 궁정 관현악단의 호른 주자였고, 어머니는 뮌헨의 맥주 재벌 프쇼어가의 딸이었다. 삼촌의 맥주홀에서 처음으로 자작곡을 연주한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집안의 후원과 자신의 노력으로 이미 젊은 시절 성공한 지휘자요 작곡가가 되었다. 가곡과 오페라라는 양대 성악음악 분야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두었고, 리스트의 뒤를 이어 교향시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영향력을 확보한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독일 작곡가 협회’를 설립하고 저작권과 공연권 보호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는 당대 자행되던 더 큰 악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 치하에서 제국 음악국 총재가 돼 나치의 문화선전에 협력했다. 물론 유대인 동료 슈테판 츠바이크를 위해 끝까지 싸웠지만, 인종주의나 아리아인 우월주의에 반대하지도 않았다. 츠바이크를 변호한 것이 참작돼 전범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슈트라우스가 그렇게 한 것은 보편적 인권이라든지 정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츠바이크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세계대전 직후, 슈트라우스는 전 생애를 뒤흔드는 회한에 빠졌다.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러한 회한이 1948년에 지은 ‘마지막 네 개의 노래’에 절절히 담긴다. 헤르만 헤세의 시에 붙인 두 번째 곡 ‘9월’의 내용은 이러하다.

“정원은 상복을 입고/꽃에 싸늘하게 내려앉는 건 비/여름은 바들바들 떨며/가만히 그의 최후를 맞이한다//금빛 진 방울방울 잎새 잎새마다/드높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내리고/여름은 놀라고 맥 빠진 너털웃음/죽어가는 정원의 꿈에다 흩어놓는다//장미들 품에서만 꽤나 오래도록/여름은 멈춰선 채 제 안식을 동경하겠지/그리고 천천히 그 크고/피곤이 든 눈을 꼭 감고 말겠지.”

헤세는 결실의 계절 가을을 ‘여름의 죽음’으로 해석한다. 문화의 절정인 가을은 오히려 죽음에 다가가는 계절, 그것은 곧 아름다움만을 좇다가 준엄한 생명의 부르짖음을 외면했던 독일 문화의 죽음과도 같았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야 하는 것을 알지만, 떠나고 싶지 않다. 저 찬란하던 예술시대에 대한 미련을 품은 듯 선율은 주저하는 넋두리 같다.

한 사람의 인생은 공과 과로 단순하게 요약될 수 없다. 모든 것이 훌륭하고 바람직하다면 좋은 일이리라. 그러나 상실과 쇠락에도, 실패와 회한에도 한 떨기 진심이 깃든다. 예술은 그 순간의 진심을 포착한다.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예술의 죽음#순간의 진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