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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글로벌 이슈/신수정]“밤에도 혼자 걷고 싶다”…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

입력 2021-03-24 03:00업데이트 2021-03-2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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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영국 런던 의회 앞에서 여성 보호 조치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시위 참석자는 ‘그녀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She was walking home)’가 적힌 팻말을 들었다. 런던=AP 뉴시스
신수정 국제부 차장
“내가 세라다(I am Sarah).”

“그녀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She was walking home).”

13일 영국 런던 남부의 클래펌 공원에서 세라 에버라드(33)를 추모하는 시위가 열렸다. 에버라드는 3일 밤 친구 집에서 나와 걸어서 귀가하다가 실종된 지 1주일 만인 10일 런던 동부 켄트주의 숲에서 가방에 담긴 주검으로 발견됐다. 오후 9시경 친구 집을 나서 4km가량 떨어진 집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근처 폐쇄회로(CC)TV에도 고스란히 찍혔다.

에버라드를 납치해 살해한 범인은 런던의 정부청사를 경비하는 현직 경찰관 웨인 쿠전스(48)였다. 평범한 여성이 집으로 가는 길에서조차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많은 여성들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세라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나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뉴욕타임스는 “에버라드는 런던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위험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고 보도했다. 에버라드 사건에 일부 남성들이 그녀가 밤늦게 홀로 귀가한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주장을 펴자 여성들은 “우리도 밤에 혼자 걷고 싶다”며 여성에게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를 바꿔야 한다며 시위에 나서고 있다.

영국뿐 아니다. 15일 호주에서는 캔버라, 시드니, 멜버른 등 40여 개 도시에서 ‘정의를 위한 여성 행진(Women‘s March 4 Justice)’ 시위에 7만여 명이 참여했다. 호주 정치권을 강타한 성폭행 의혹이 도화선이 됐다.

호주 의회에서 근무하는 브리트니 히긴스(26)가 2019년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하자 의회 내에서 벌어진 성폭행을 폭로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크리스천 포터 연방 법무장관까지 성폭행 의혹에 휩싸이면서 호주 여성들의 분노는 커졌다. BBC는 “호주 의회 내 성폭행 사건은 호주 사회 전반에 걸친 성차별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고 대규모 시위에 불을 지폈다”고 전했다. 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변화를 촉구했다.

20일에는 터키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터키 정부가 여성폭력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제협약인 ‘이스탄불 협약’에서 갑자기 탈퇴하겠다고 밝히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이스탄불 협약은 전통, 문화, 종교를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의 명분으로 삼을 수 없으며 각국이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4년 발효된 협약에는 터키, 유럽연합(EU) 주요국 등 45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2003년부터 장기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슬람 근본주의와 우경화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탈퇴를 감행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 수도 앙카라, 이즈미르 등 곳곳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에서 여성들은 “우리 목숨을 지켜주는 협약을 비준하라”고 외쳤다. 지난해 터키에서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여성은 약 400명이고 올해도 78명이 숨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염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각종 폭력에 노출돼 인권을 침해당하는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0∼2018년 161개국의 여성 폭력 사례를 조사한 결과 15세 이상 여성 중 성적·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약 7억3600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여성 3명 중 1명꼴로 성적·신체적 폭력을 당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여성들에게 최고의, 그러면서도 최악의 시절이 시작되었다. 어떤 여성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또 다른 여성들은 그나마 있는 권리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다.”

소설 ‘시녀 이야기’를 쓴 마거릿 애투드가 2018년 한 말이다. 2030년이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여성들이 소유할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로 여성은 이전보다 강하고 부유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밤에도 혼자 걷고 싶다’는 여성들의 외침을 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신수정 국제부 차장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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