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진짜 얼굴[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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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올 한 해 살아온 삶을 돌아봅니다. 성공과 실패가 각각 얼마를 차지하는지 따져 봅니다. 계산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성공이고 실패인지 정의가 필요합니다. 판단은 어렵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 아니면 실패일까요? 돈을 벌어서 빚을 갚았다면 성공이겠습니다. 검소하지만 평온한 삶을 소망해 왔다면 돈을 번 것이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남들의 시기가 섞이면 삶이 어수선합니다.

성공이 끝이 아닙니다. 자아 기능이 약하면 부러움의 폭격에 무너집니다. 실패가 실패로만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아 기능이 강하면 성공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현실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성공이 실패’, ‘실패가 성공’이라는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세상에 실패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실패하려고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실패의 본질은 스스로 자신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것입니다. 실패는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인데 무의식에서는 ‘뜻한 대로 된 것’이 실패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실패를 불러오는 전령 역할은 공격성이나 죄책감이 합니다. 성공에 따른 파괴력이 두려우면 공격성은 노력의 방향타를 실패 쪽으로 돌립니다. 성공에 따른 포만감을 즐길 예상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역시 실패를 향합니다.

실패하려는 성향이 지나치다면 ‘중독’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술, 담배, 약물과 같은 물질이 아닌, 행위에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실패 중독은 ‘중독’의 정의에 합치됩니다. 해를 입을 것이 뻔해도 특정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지속합니다. 실패가 되풀이되면 학습력, 기억력, 판단력, 결정력, 행동 통제력에 금이 갑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성공 대신 실패를 선택하는 것이 유아적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어른이 되어도 유아적 욕구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원초적인 욕구는 남아서 마음을 움직입니다. 외부에서는 현실 세계가, 내부에서는 마음이 끊임없이 조율하려 하지만 일단 통제를 벗어나면 욕구는 작용합니다. 유아적 공격성이나 죄책감이 뛰쳐나오면 성공이 뒤집히면서 실패로 변합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마음을 수습하려고 핑곗거리를 만듭니다. 운명, 팔자, 박복함, 엄중한 현실,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달래지만, 실패의 원인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기회가 왔어도 준비가 안 되었거나, 놀라서 회피했거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겁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기회를 만들기보다는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골똘하게 생각만 하며 소망한다고 해서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노력해 기회를 만들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쉽게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실패의 강에서 빠져나오려면 힘들어도 지쳐도 목표까지 헤엄쳐서 도달해야 합니다.

자신이나 남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실패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진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내서 성공하려는 순간 밀어내고 실패로 마무리합니다. 유아적 공격성 충동에서 벗어나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 직전에 자신을 거부하도록 유도합니다. 냉담해지거나 비꼬거나 변덕을 부립니다. 공격성으로부터 상대방과 자신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겉으로는 상대방이 거부한 것이니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패하려는 사람이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무의식적으로 성공의 싹을 잘라버리고 실패를 향해 나아갑니다. 뻔히 이득을 볼 사업을 순간의 착오로 날립니다. 전능하다는 생각에 취해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넘어서려고, 이용하려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어린아이처럼 착각한 결과입니다. 환상을 현실로 옮긴 겁니다. 환상에 빠져 현실을 냉철하게 검증하지 못하면 소망이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마주칠 장애물을 못 봅니다. 스스로 실패의 길로 들어섭니다.

성공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면 당연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확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그 순간 스스로 실패의 늪에 빠집니다. 자아 기능이 너무 허약해서 감히 성공에 따른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꽤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삽니다.

새해는 새 기회입니다. 실패로 본 쓴맛은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피한다면 그 역시 실패입니다. 자리를 물러나면서 흔히 “큰 잘못 없이 마쳤다”고 하는 말은 실속 없이 허망합니다. 겸손하게 들리지만, 도전을 회피해서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겁니다. 본전을 못 건지고 손해를 본 것입니다.

실패로 인한 상실감이 도전을 망설이게 하니 이해는 합니다. 또 다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동굴에 숨는다면, 마음을 달래는 동안 기회가 동굴 밖을 조용히 스쳐 지나갑니다. 실패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여긴다면 기회가 보입니다. 나를 남들이 실패자로 흉보아도 스스로 성공할 사람으로 여긴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삶#실패#진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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