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말 뒤에 숨겨진 것[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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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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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세상이 말에 파묻혔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는 말이 있고, 불편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들을수록 사람을 지치게 하는 말도 있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본질은 익사합니다. 나쁜 말은 소통을 방해하고, 관계는 금이 갑니다. 현실을 무난한 단어로 감싸려는 시도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현실과 말 사이가 벌어질수록 신뢰는 추락합니다. 말과 실천이 다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뜻을 알기 어려운 말들이 돌아다닙니다. ‘말놀이’를 넘어 ‘말장난’ 수준의 말이 넘칩니다. 제정신을 지키려면 말의 속성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말은 왜 할까요? 자기 속을 털어놓으려고 하나요? 일상과 달리 신문 방송에 쏟아져 나오는 말은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의도대로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마음을 숨기려는 말도 들어 있습니다. 숨긴다는 것은 들키지 않으려는 겁니다. 쉬운 방법은 침묵이지만, 침묵조차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습니다.

침묵도 방법이 아니라면? 복잡하고 어렵게 말을 하면 됩니다.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려운 말을 어렵게 하면 마음을 숨길 수 있습니다. 정말 몰라서 어렵게 말하기도 하지만, 잘 알면서 일부러 어렵게 말하기도 합니다.

숨길 의도로 말을 쉽게 하려면, 모호하게 말하면 됩니다. 모호한 말은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같은 말을 같은 시간에 들어도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같은 단어에도 뜻이 여럿입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같은 단어를 두고 말한 사람과 들은 사람 사이의 격차는 늘 생깁니다. 말이 가진 힘도, 말이 가진 함정도 거기에 있습니다. 말이 가진 힘은 제대로 못 듣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말의 함정에 빠지면 뻔한 이야기를 정반대로 해석해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합니다. 그런 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세먼지처럼 다가갑니다. 말이 지닌 의미의 다중성이 과도하게 확대되면 암시를 넘어 말장난이라는 엉뚱함으로 벗어납니다.

그 사람이 쓰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왜, 어떻게 하는지 짐작됩니다. 우선, 들리는 말의 주어, 동사, 목적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을 장식하는 형용사, 부사, 접속사, 전치사도 중요합니다. 말하는 속도와 음성의 높고 낮음에 주의를 기울이면 감정 상태는 물론이고 사고방식이 견고하고 일관성이 있는지도 파악하게 됩니다.

‘전문가’는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입니다. 학자, 의사, 법조인, 공직자, 정치인들은 전문용어를 써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의사들은 의과대학 그리고 전문의 과정의 긴 세월 동안 낯선 용어들을 정확하게 익히려고 힘을 기울입니다. 전문용어의 장점은 전문가 사이의 소통을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보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들어야 하는 단어일 뿐입니다. 꼭 필요할 때만 적절하게 써야 합니다. 대중과 소통할 때는 일상의 용어로 풀어내야 합니다. 다른 전문가도 그래야 합니다. 아직도 관공서에서 오는 공문은 어렵습니다.

어떤 ‘전문가’는 정말 피동형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상황은 ○○○라고 보여집니다”를 연발합니다. 그냥 “나는 ○○○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하면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정 어려우면 “○○○로 보입니다”도 참을 만합니다. 언급의 주체를 생략함으로써 숨어버린 겁니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안 지겠다는 의도도 조금 엿보입니다. ‘이중 부정’ 화법은 더 끔찍합니다. “○○○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현기증이 납니다.

고사성어(故事成語) 뒤에 습관적으로 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데 왜 중국 고전을 가져와서 써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한글세대 국민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말은 모습을 보인 동시에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우리말로 풀어 썼으면 합니다. 어떤 경우는 과연 뜻을 속속들이 알고 썼는지 걱정됩니다. 직유와 은유의 현란함 뒤에 마음을 숨기기도 합니다. ‘사자처럼 용감’은 ‘사람이 아님’이라는 뜻일 수도, ‘밤의 장막’이라는 시적인 표현이 ‘암흑의 장막’을 뜻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통이 중요합니다. 소통은 쉬운 말로 해야 합니다. 자기만의 입장에 갇혀 말하고 듣는다면 소통은 먼 이야기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어려운 말#세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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