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사의 요구[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52〉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입력 2020-08-05 03:00수정 2020-08-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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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처럼 실존적 위기에 처할 때 소환되는 작품들이 있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 ‘하얀 역병’도 그중 하나다. 이 희곡은 몸에 하얀 반점이 생기면서 사망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쓰는 상황을 펼쳐 보인다.

‘베이비페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의사가 등장한다. 순진하게 생겨서 옛 스승이 붙인 이름이다. 오직 그만이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60%의 환자가 완치되고 있으니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그런데 그는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가로 전쟁을 그만두라는 조건을 내건다. 바이러스로부터 사람들을 살리겠다면서 전쟁을 통해 사람들을 학살하는 분열적인 행태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언론의 선동으로 전쟁의 광기에 휘말린 소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를 ‘평화주의 역병’에 걸린 미치광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고문해서라도 치료법을 입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빈민가의 사람들만 치료한다. 그러한 선택적 진료가 의료 윤리 위반이라는 비난에는 이렇게 응수한다. “빈민들은 더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살 권리는 누구한테나 있으니까요.” 빈민과 다르게 부자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으니 치료를 받고 싶으면 정권을 압박해 전쟁을 그만두게 하라는 것이다. 결국 의사는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군중의 손에 죽고 만다.

희곡에 나오는 순진한 얼굴의 의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누군가가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가로 똑같은 조건을 내건다면 세계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백신을 개발한 개인이나 단체가 그것을 무료로 제공할 리는 없겠지만, 설령 제공한다고 해도 모두가 그 조건을 수용할까. 차페크의 희곡이 상정하는 평화와 인류애의 실현은 순진한 꿈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러한 꿈을 들이밀고 공동체의 윤리를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 예술의 존재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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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실존적 위기#카렐 차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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