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패배자들, 한화와 시카고 컵스[광화문에서/이헌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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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골수 한화 팬 A는 멍하게 TV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날도 한화는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었다. 그는 수시로 쓴 한숨을 내뱉었다. 보다 못해 주위에선 “응원 팀을 바꿔 보면 어때”라고 권했다. 이에 돌아온 허탈한 대답.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진작 그랬지.”

요즘 한화 팬들의 마음은 무척 무겁다. 거의 매년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올해는 정도가 더 심하다. 한용덕 감독은 14번을 내리 패한 뒤 사퇴했다. 18연패를 당했던 프로야구 초창기 최약체 팀 삼미의 향기가 난다. 한화는 답이 없는 팀이다. 셋이 합쳐 15번이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프로야구의 ‘3김(金)’ 김인식, 김응용,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모두 두 손을 들었다.

ESPN은 지난달 KBO리그 개막 직전 한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패배자들(the lovable losers)이다. 예전 시카고 컵스와 닮았다.”

한화와 컵스는 공통점이 많다. 승리보다 패배가 익숙한 팀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성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10점 넘게 지고 있는데 육성으로 “최, 강, 한, 화”를 외치는 팬들을 보고 있자면 눈물이 나려 한다.

한화는 불과(?) 21년 전인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하지만 컵스는 2016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기까지 무려 108년 동안 무관이었다. 미국 4대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오래 우승을 못 한 팀이 컵스였다. 하지만 컵스 팬들은 거의 매 경기 리글리필드를 가득 메웠다.

2010년대 초반의 컵스는 지금의 한화와 많이 닮았다. 성적은 바닥이었고, 주전들은 노쇠했고, 유망주들은 찾기 힘들었다. 가장 심각하게도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컵스가 암흑기를 뚫고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테오 엡스타인 사장(47)이었다. 2004년 보스턴 단장으로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팀을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그는 2011년 말 컵스 사장으로 부임했다. 구단은 팀을 재건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5년 계약을 했다.

엡스타인은 ‘숫자’와 ‘사람’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팀을 다시 만들었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를 기반으로 인성 좋은 선수들을 데려왔다. 스카우트들은 선수가 무슨 책을 읽는지, 교우 관계는 어떤지도 살펴야 했다.

부임 첫해 컵스는 꼴찌였다. 2년째인 2013년, 3년째인 2014년에도 역시 꼴찌였다. 하지만 내부는 크게 변했다. 몇 년간 기회를 받은 유망주들이 서서히 껍질을 깨려 하고 있었다. 4년째인 2015년 컵스는 마침내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거물 투수들과 즉시 전력감인 야수를 보강했다. 신예와 베테랑의 조화가 이뤄진 그해 컵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6년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엡스타인 사장에게 쏟아졌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2017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50인’을 선정하며 엡스타인 사장을 1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3년 연속 꼴찌를 하는데도 그를 끝까지 믿어준 구단주가 있었고, 지독한 패배를 견뎌준 팬들이 있었다. 한화가 컵스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뿐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kbo#한화#시카고 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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