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正義가 무너진 사회에 사는 者의 고통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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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사태 힘든 건 尹때문 아냐… 사회의 상식 마비·가치 전도 때문
오염된 정의, 오염된 공기처럼 內傷… 親日 프레임은 만능의 갑옷인가
文, 과거 집착 버리고 미래와 싸울 때

박제균 논설주간
박제균 논설주간
윤미향 사태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윤미향 때문이 아니다. 공사(公私) 구분이라고는 없는 사람이 시민운동, 그것도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활동가 역할을 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운 성역이 되고 여당 비례대표 의원까지 꿰차는 게 아직은 우리 시민운동과 정치문화의 수준이라고 본다. 다른 시민운동의 영역과 비정부기구(NGO)에 제2, 제3의 윤미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윤미향 사태의 본질은 윤미향 개인의 일탈보다는 지난달 7일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한 달 가까이 우리 사회가 보여준 상식의 마비와 가치의 전도(顚倒)에 있다. 되레 이 할머니를 모욕하고, 시대착오적인 ‘친일 프레임’을 들이대며, 여권(與圈)의 비호 아래 윤 당선자가 금배지의 방패를 달기 바로 전날 버젓이 기자회견까지 하는 이 사회…. 과연 정상인가.

자연스럽게 조국 사태의 악몽이 소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 한 달 만에 숱한 의혹에도 임명을 강행했고, 다시 한 달여 뒤 조 장관이 사퇴했다. 그 두 달여, 우리는 ‘조국 내전(內戰)’이라고 부를 정도의 진영 간 극한 대결은 물론 도덕과 양심, 상식과 정의의 도착(倒錯) 상황 같은 걸 경험했다. 조 전 장관의 차를 물티슈로 ‘세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태가 우리 사회 일각에 깊은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음을 봤다.

그래도 조국은 물러나기라도 했다. 윤 당선자는, 아니 윤 의원은 언제까지 21대 국회의 문을 당당하게 드나들면서 열일곱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을 팔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대모(代母)로 남을 건가. 민주화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조국과 윤미향처럼 언행이 철저히 불일치하는 의혹덩어리 내로남불 인사들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장기적인 소모전을 벌인 일이 없다. 그 소모전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도 정의는 언젠가 실현된다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자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정의는 어느덧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정의가 오염되면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내상(內傷)을 입는다. 반미(反美)를 외치며 자식은 미국 유학 보내는 이들, 반미는 생계고 친미(親美)는 생활인 사람들이 외려 정의를 외치는 사회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게다가 현재의 정의를 오염시키는 것도 모자라 과거의 정의까지 뒤집으려는 기도(企圖)마저 나온 지 오래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 재심,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재조사,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에 대한 현충원 안장 불가론에 조선시대 사화(士禍)를 연상케 하는 ‘현충원 친일파 파묘(破墓)’ 주장까지….

언제까지 이럴 건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고,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은 물론 시민사회 노동 권력까지 사실상 장악했다고 과거의 정의를 뒤집고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다. 역사는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팩트와 진실로 써지는 것이기에. 선거의 승자가 역사의 승자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이 정권의 지독한 과거 뒤집기와 역사 바꾸기의 근저엔 문 대통령의 ‘세상 바꾸기’ 집착이 있다고 본다. 친일→독재→보수로 이어지는 주류세력을 교체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래서 그 시발점인 친일 문제에 유독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일본의 경제보복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란, 대통령답지 않은 격정의 언사를 쓴 데서도 그의 세계관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광복 이후 75년. 일제 치하보다 두 배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친일’ ‘반일’ 하며 다툴 정도로 우리는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무엇보다 ‘세상 바꾸기’를 위한 주류세력 교체도 이쯤이면 만족할 수준 아닌가. 대통령이 과거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앞으로 비리 의혹 당사자들은 친일 프레임을 만능의 갑옷처럼 두르고 정의를 오염시킬 것이다.

대통령은 역사의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 대상이다. 그러니 문 대통령은 과거와 역사 문제에 좀 더 겸허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 사태에 미중(美中)이라는 거인이 온 동네를 휘젓고 싸우다 우리 집 문을 발로 걷어차기 직전의 위기다. 집 안에서 우리끼리 복닥거리며 싸울 때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를 다시 세워 과거가 아닌 미래와 싸울 때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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