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은 가치의 전환이었다[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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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풀기만 아니라 사회제도-철학 바꾼 게 뉴딜
원격의료 봉인 연 한국형 뉴딜도 그럴 수 있어야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지난주 좌파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개 서신을 보냈다. 정부가 한국형 뉴딜의 일환으로 제시한 원격의료 추진을 그만둬야 한다는 내용이다. 원격의료가 의료 민영화로 이어진다는 건 진보진영의 오랜 반대 논거다. 그래서 우 박사의 주장은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눈길을 끈 건 이 대목이다.

“굳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의료보험 상한제’를 외치던 2012년의 문재인과 ‘한국형 뉴딜’에 ‘비대면 진료’를 포함시킨 그 문재인이 같은 문재인인가, 그런 내적 갈등 때문만은 아닙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지금의 비대면 진료는 촛불집회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될 정권 차원의 위기일 수 있습니다. 파장이 클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우리가 ‘의료 공공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그 순간을 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공유하는 사람과는 종종 미래를 함께하기가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우 박사는 문 대통령이 치른 두 번의 대선을 함께했다. 노무현 정권 때도 이랬다. 당시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지지층 이탈로 이어진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예속화로 이어진다던 한미 FTA가 없었다면 한국 제조업의 고용 유지 기능이 얼마나 더 버텨줬을지 의문이다. 미국이 나중에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협정이라며 개정을 요구했을 때, 그동안 FTA에 극렬히 반대했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팬데믹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온 건 과거와 단절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통계청의 올해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서 하위 20%의 근로소득(임금 등) 감소로 소득불평등이 커졌지만 그 책임은 모두 코로나 때문으로 해석됐다. 소득주도성장으로 허약해진 저소득층의 기저질환은 거론조차 안 됐다.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몰락도, 제조업의 체력 저하도 모두 감염병 탓으로 돌려졌다.

기왕 코로나 면죄부를 받았으니 새로 출발해야 한다. 그 시작이 한국형 뉴딜이 될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하려면 과거와의 결별이 필요할 게다. 대공황 때 미국의 뉴딜이 돈 많이 푸는 확대 재정 정책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뉴딜은 제도와 가치관의 대전환을 전제로 했다. 당시 미국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인정했고 최저임금, 최고노동시간 제도를 도입했다. 현대 미국의 복지 제도는 대부분 그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의 기득권적 반발은 이후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수요 폭증으로 무마됐다.

방향이야 어찌됐건 한국형 뉴딜도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만들지 않으면 발걸음을 떼기 쉽지 않을 것이다. 원격의료는 언뜻 의료계가 가장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의료 공공성이라는 진보적 가치가 훼손됐다고 생각하는 여권 지지층의 반발이 가장 큰 장벽일 가능성이 높다. 해외로 나간 기업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수도권 입지규제를 완화하는 리쇼어링 지원 방안 역시 표면적으로는 환경부와 국토부가 반대한다고 하지만 결국엔 이 정부와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균형발전론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관건이다.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의 지난 3년은 태종이었고,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이 됐으면 한다는 말이 나왔다. 태종이 조선의 기틀을 갖추고 세종의 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건 네 처남을 처형하고 측근인 이숙번까지 제거함으로써 공신집단을 와해시킨 덕분이다. 임금과 군신관계가 아닌 혁명동지였던 세력을 해체해 새 시대를 연 것이다. 변화와 혁신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뉴딜도 마찬가지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한국형 뉴딜#원격의료#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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