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거래” vs “감시 사회”… 세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논란[인사이드&인사이트]

구가인 국제부 기자 입력 2020-03-06 03:00수정 2020-03-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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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오른 디지털 기축통화 패권전쟁
구가인 국제부 기자
세계 각국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발행 경쟁에 돌입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1월 보고서에 따르면 66개 중앙은행 중 약 80%가 “CBDC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요 2개국(G2)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중국 런민(人民)은행이 올해 안에 ‘디지털위안화’를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고 지난해까지만 해도 CBDC에 부정적이었던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역시 발행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도 지난달 전담 조직을 출범시켰다. 잇따른 CBDC 발행이 각국 금융시장과 통화정책의 대대적 변화는 물론 종이화폐의 소멸 등 인간의 생활양식 전반을 바꿔놓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투명 사회 vs 감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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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DC는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전자 화폐다. 비트코인, 리플 같은 민간 회사의 암호화폐와 달리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므로 기존 법정통화와 일대일 교환이 가능하다. 실명 거래가 가능하고 거래 과정도 투명하게 드러난다.

형태는 크게 중앙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계정형’, 비트코인 같은 ‘토큰형’으로 나뉜다. 이용 주체에 따라 금융사 간 거액 결제용(도매용), 개인이 주로 쓰는 소액 결제용(소매용)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아직 본격 도입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찬반 논란이 뜨겁다. 찬성론자들은 기존 화폐의 막대한 발행·보관·유통비용이 감소하면서 편의성과 효율성이 대폭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2018년 기준 한국은행의 화폐 제조 비용은 1104억 원, 폐기한 손상 화폐는 6억2700만 장이다. 쌓으면 세계 최고 에베레스트산의 7배 높이에 이른다. 이런 비효율성이 대폭 경감된다는 주장이다.

투명성 강화로 뇌물·탈세·자금세탁 등 각종 금융범죄 방지, 세수(稅收) 증대 등을 기대할 수도 있다. 파산 및 지급 불능 위험이 없는 만큼 거래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이 외에도 통화량 증가 등 거시 경제에 관한 각종 지표와 수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고 실시간 데이터 수집도 가능하다. 중앙은행이 보유 한도, 이자율, 사용 시간 등을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어 통화·재정정책 집행의 정확성이 높아진다.

반면 CBDC로 자금이 몰려 시중은행들이 위축될 수 있고 각 경제주체의 사생활 침해 우려가 크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실상 감시 사회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다.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간 업무가 중복되면 기존 금융 체계와 실물 경제 전반에 불안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등 신용카드 사용과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된 국가에선 CBDC의 긍정적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미 모바일 결제 등에서 소외된 노약자, 저소득층이 추가로 배제될 가능성 또한 거론된다.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은 “화폐의 디지털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금융 약자의 소외를 부추긴다. 모든 사용 주체를 포용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 신흥국은 소액 vs 선진국은 거액결제 선호

CBDC에 먼저 관심을 보인 나라는 역설적으로 화폐 가치가 불안정하고 지급 결제 체제가 낙후된 우루과이 바하마 등 개발도상국이다. 국민 상당수가 신용카드조차 없으므로 CBDC를 일종의 대안 신용카드로 삼겠다는 의도다.

다만 낙후된 체계로 발행 및 정착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만성적 경제난과 살인적 고물가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가 대표적 예다. 2018년 2월 최초의 국영 암호화폐 ‘페트로’를 출시했다. 발행 주체가 중앙은행이 아닌 정부여서 CBDC의 전 단계 성격으로 평가받는다.

베네수엘라는 막대한 원유를 보유한 국가라는 이점을 살려 원유 50억 배럴을 담보로 페트로를 발행했다. 당시 1페트로 값은 베네수엘라산 원유 1배럴 가격인 60달러. 한 달 후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미국의 금융 제재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며 미국 내 거래를 금지했다. 국민들도 달러를 선호해 아직까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신용카드 사용이 활발한 캐나다 프랑스 스위스 등 선진국은 거액결제용 CBDC에 관심이 많다. 현재 은행 대 은행 간 거래 등 금융기관 간 이뤄지는 송금, 결제 등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면 거래 속도와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미다.

선진국에서는 특히 CBDC가 한계에 부딪힌 기존 통화정책을 넘어 새로운 정책 수단이 될 수 있을지를 주목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연준,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국·공채, 주택저당증권(MBS), 회사채 등 다양한 자산을 사들여 시중에 막대한 돈을 푸는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경기부양 효과가 크지 않았고 단기간에 불어난 유동성이 부동산 급등 등 부작용만 키웠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세계 각국의 경기 둔화 우려가 큰 상황에서 CBDC 발행이 현실화되면 중앙은행과 민간의 직접 거래가 가능해져 기존 양적완화 에 비해 정책 집행이 수월하고 효과도 더 빨리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 미중 패권 경쟁

CBDC가 첨예한 미중 패권경쟁을 격화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후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위안화 국제화를 집요하게 시도해 왔다. 하지만 1월 국제은행 간 통신협회(SWIFT)의 세계 지불통화 비중에서 위안화는 불과 1.7%만 차지하고 있다. 달러(40.8%)와 유로(33.6%)는 물론 영국 파운드(7.1%) 일본 엔(3.3%) 캐나다달러(1.8%)에도 못 미친다.

중국에서는 위챗페이, 알리페이 등 민간 사업자가 모바일 결제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디지털 금융 환경이 정착된 상황에서 CBDC로 날개를 달아 기축통화 발권국이란 미국의 위치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런민은행이 84건의 디지털화폐 특허를 출원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0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블록체인이 디지털 금융, 사물인터넷(loT)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 개발을 자주 혁신의 돌파구로 삼아야 한다”며 ‘블록체인 굴기’를 선언했다. 비(非)거주자의 무역 결제 및 자본 거래에서 반드시 CBDC를 사용하라고 압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CBDC가 중국의 내수 부양 및 사회 통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심각한 지방은행 부실, 부동산 거품, 증시 약화, 미중 무역전쟁 여파 등으로 경기둔화 위협이 큰 상태에서 중국인의 불법적인 해외자본 유출을 차단하는 도구로 CBDC를 사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미 기축통화 달러를 보유한 미 연준은 그간 CBDC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제롬 파월 의장은 “발행 계획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이사는 지난달 “우리가 CBDC 정책 개발 및 연구의 개척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며 입장을 바꿨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부 디지털화폐의 영향력이 커지면 달러를 보유한 미국 역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특정국이 아닌 국제 공통의 CBDC를 만들자는 주장도 등장했다. 마크 카니 영국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해 8월 ‘합성패권 통화’(SHC·Synthetic Hegemonic Currency) 개념을 제시했다. 각국의 CBDC 네트워크를 연결해 일종의 ‘디지털 공동 통화’를 만들어 기축통화로 쓰자는 주장이다. 미국과 중국 둘 중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영국, 일본, 스웨덴, 스위스, 캐나다 중앙은행과 ECB는 4월 국제결제은행(BIS)과 공동으로 CBDC 모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공통 CBDC 발행에 관한 논의가 이뤄질지에 관심이 모인다.

일각에서는 활발한 CBDC 도입 논의가 역설적으로 기존 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 심각함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세계 금융위기 후 주요국 화폐 안정성이 약화되고, 양극화 심화 등 전통 경제학 이론으로 풀 수 없는 난제가 속출하는 데다, 위기 발생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CBDC가 정확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중앙은행의 전통적 역할과 위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관한 논란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구가인 국제부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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