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과의 와유(臥遊)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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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세상을 다 유람하기 어려운 데다가 그럴 힘도 갖추지 못한 탓에, 그림을 펼쳐놓고 산수를 감상하는 것을 와유(臥遊)라 하였다. 와유란 몸은 누워 있어도 정신은 노니는 것이니 앉은자리에서 감상하더라도 마음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성호 이익의 ‘와유첩발’에 나오는 말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남한강 편 머리말에서 와유를 말한다. ‘이 책이 꼭 현장에 가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한강의 산수를 누워서 즐기는 와유가 되기를 바란다.’

사신단에 속하지 않는 한 조선에서 외국여행을 떠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수삼(1762∼1849)은 그렇게 중국을 다녀왔지만 더 많은 나라의 사정이 궁금했다. 명나라 지리서 ‘방여승략’을 읽고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이 책에 나오는 80여 개 나라의 문물과 습속, 풍토 등을 시와 산문으로 풀어낸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를 남겼다. ‘먼 곳으로 여행하고 싶은 뜻에서(遠遊志) 지었다’는 말이 사뭇 간절하다.

살마아한(撒馬兒罕), 즉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관한 부분은 이렇다. ‘땅은 오곡에 적합하고 왕은 높고 넓은 궁에 살며, 시장이 번성하여 변방의 물산이 다 모인다. 세밀한 공예가 발달하여 무늬 새겨 조각하고 수놓은 비단을 짜며, 금박으로 새겨 경전을 만들고 보물이 많다.’ 실제로 가보진 못했으나 읽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고, 독자들도 여행을 대신하여 읽었을 테니 철두철미 와유문학이다.

조선 후기에는 산수 유람에 관한 시문을 모아 편찬한 ‘와유록(臥遊錄)’이 유행하였다. 실제 유람에 참고하는 여행안내서 구실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시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람하는 용도로 많이 읽혔다. 제목 그대로 와유를 위한 기행문학 선집이었던 것. 서유구는 산수가 그려진 병풍을 ‘와유하게 하는 물건’이라 했다. 허균은 산천의 모양을 그려 넣은 지도를 보며 와유하곤 하였다.

서양에서 독서와유의 일인자는 철학자 칸트가 아닐까 한다. 칸트는 태어난 도시에서 평생 한 번도 멀리 여행한 적이 없었지만, 독서로 쌓은 간접 견문이 워낙 풍부하여 마치 살다가 금방 돌아온 것처럼 외국 사정과 풍광을 묘사할 수 있었다. 독서와유는 편한 자세로 어디서든 임할 수 있으며 돈이 많이 들지 않고 일정 조절이 자유로우며, 떠날 곳도 무궁무진하다. 사정상 휴가여행을 떠나기 어렵다면, 서점에서 여행기 고르는 것을 출발로 독서와유를 떠나볼 일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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