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건의 뉴스룸]궂은일 마다 않는 ‘도메스티크’의 미학

  • 동아일보

이승건 스포츠부 기자
이승건 스포츠부 기자
“지도자들을 압박해 기량이 부족한 자신의 아이를 선발로 출전시키려는 부모들이 간혹 있어요.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은 자신의 아이도 망치는 일입니다. 아이가 부족함을 느끼고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니까요.”

최근 ‘우정을 위한 축구(Football for Friendship)’ 국제챔피언십이 열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내 유소년 축구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는 함상헌 서울 신정초교 감독을 만났다. 그는 “자기 자식만 최고여야 된다는 생각은 모두에게 독이 된다. 그런 부모들이 바뀌어야 한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0년 이 학교에 부임한 뒤 우승만 100회 가까이 했고 올해도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함 감독의 얘기를 들으며 얼마 전 막을 내린 도로 사이클 대회 ‘투르 드 코리아(TDK)’가 떠올랐다.

도로 사이클은 얼핏 개인끼리의 경쟁처럼 보이지만 단체종목 못지않은 팀플레이가 바탕이다. 도메스티크(Domestique·하인, 집사)라는 존재가 이를 말해 준다. 팀에 따라 한 명 또는 그 이상인 도메스티크는 팀과 리더를 위해 희생하는 게 임무다. 리더의 앞에서 달리며 바람을 막아주는가 하면 뒤에 따라오는 팀 차량에서 물병을 받아 동료들에게 배달한다. 다른 팀의 경쟁자가 리더를 위협할 때는 대신 맞서주기도 한다. 리더의 자전거가 고장 났을 때 자신의 자전거와 바꿔 주는 경우도 있다.

이번 TDK에서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한 서울시청의 민경호의 애초 임무는 도메스티크였다. 이미 이전 대회들에서 기량을 검증받은 선배들이 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경호는 둘째 날 기적을 만들었다. 군산에서 무주까지 156.8km를 달리는 제2구간에서 결승선을 6km 정도 남겨 놓고 맨 앞으로 달려 나간 뒤 끝까지 리드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민경호가 리더가 되겠다고 결정할 수 있었던 데는 팀원들의 레이스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감독의 지시가 있었다. 생애 첫 구간 우승을 차지한 그는 옐로 저지(개인종합 1위가 입는 노란 셔츠)를 입었다. 이후 열린 3구간부터 최종 5구간까지는 다른 팀원들이 도메스티크를 자처했다. 소속 팀 선수의 옐로 저지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한국 선수 최초로 국제사이클연맹(UCI) 1등급 투어에서 우승한 민경호가 “모든 게 팀원들 덕분이었다. 다음에는 나도 모든 것을 바쳐 동료를 도울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당장은 빛나는 역할이 아니더라도 ‘팀은 개인보다 위대하다’는 진실을 믿고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도로 사이클 대회의 대명사 투르 드 프랑스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노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프룸 역시 데뷔 후 한동안 도메스티크를 맡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세계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선 사례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사교육 지옥’이 된 것도 자기 자식만 잘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은 아닐까. 모두가 에이스가 될 수는 없다. 자기 일에 충실한 마당쇠처럼 누군가는 궂은일도 해야 한다. 너도나도 앞에만 서려 하면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이승건 스포츠부 기자 why@donga.com
#함상헌#투르 드 코리아#tdk#도메스티크#domes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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