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44>통증의 형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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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의 형식
―김희업(1961∼)

생각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
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통증은 쪼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버티다가도 정들 만하면 어느 새 날아가는 바람둥이 새

순간을 제치고 몸속 한 획을 긋는 통증
먼 길 돌고 돌아 까마득한 새벽 어디서 왔을까

종종 통성명 없이 불쑥 나타나
평소에 없던 수많은 감정을 들춰내 죽이고 살리길 거듭
이대로라면 자멸에 평안히 도달할 것인가

내가 아니었으면, 해서 몸을 떠나고 싶은 떳떳한 출가

어떤 통증은 병명 없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높은 가지의 이파리 하나가 공중의 하루를 잠깐 날다 떨어졌다
그 위로
무지개를 새긴 문신의 통증에 대해, 고통의 화려함에 대해 하늘이 속삭이듯 고백한다

어둠을 몰아낸 형광등 빛, 바라본 동공엔 눈부신 통증이 깜박거렸다

오늘도 추운 곳에서 빙하가 녹는다 진리처럼 모순처럼
따뜻한 통증을 동반한 채

그러니
멀리 근처에도 통증은 있어
언젠가 상쾌할 거라는 가설은 미완성으로 남겨놓는다      
       


‘생각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니 이 통증은 몸의 것이 아니리라. 하지만 생각도 통증을 느끼는 것도 몸의 일. 화자는 생각만 하면 아픈, 생각이 아픈 사람이다. 화자의 통증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다. 그 통증을 일으키는 ‘생각’은 ‘쪼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버티다가’ 어느 새 사라지기도 하지만, ‘순간을 제치고 몸속 한 획을’ 그으며 어김없이 돌아온다. 특히 혼자 깨어있는 새벽이면 ‘불쑥 나타나’ ‘수많은 감정을 들춰내’ 화자를 들쑤시며 죽일 듯이 괴롭힌다. 아, 몸이 없으면 이 고통도 없겠지. 얼마나 강렬한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의 통증 속에서 화자는 ‘높은 가지의 이파리 하나가 공중의 하루를 잠깐 날다’ 떨어지는 감각을 느낀다. 그 ‘무지개를 새긴 문신의 통증에 대해, 고통의 화려함에 대해 하늘이 속삭이듯 고백한’단다. 화자에게 용서를 구하듯이. 아, 화자는 하늘이 새긴 지울 수 없는 문신, 그러니까 제 존재를 앓고 있는 것이다. 이 통증! 깡깡 언 얼음처럼 견고한 통증! 그런데 얼음은 얼음의 열이 있어, 그 열로 얼음 자신을 녹인다네. 통증은 나의 힘! 크게 다쳤을 때 비명을 지르면 좀 덜 아프다. 비명을 지르는 대신 화자는 저 자신의 통증에서 몸 받은 모든 존재들의 통증으로 ‘생각’을 확산하고 분산한다.

황인숙 시인
#생각#통증#통증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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