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국사 교과서는 진지전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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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 현재 한국사 검정교과서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도 고등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내 아이가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서 걱정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필수화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배우게 하고 싶지 않다.

교학사 교과서의 사실상 실패는 안타까운 일이다. 좌파 역사학계의 공격이 다양성 확보라는 검정체제의 취지를 거스르는 부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좌파 역사학계만 탓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학사 교과서가 적지 않은 결함으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라도 최대한 결함이 적은 교과서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앞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한국사를 필수화 해놓고 마땅한 교과서가 없으니까 이제 검정을 국정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 정부는 국정화를 하면 교학사 교과서 실패를 뛰어넘는 최종적 승리를 얻는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다음 정권이 그것을 뒤집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그 승리는 결코 승리가 될 수 없다.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은 그람시식으로 말하자면 진지전이다. 단번에 승패를 결정짓는 섬멸전이 아니라 조금씩 영토를 넓혀가는 진지전이다. 한 사회는 군대와 경찰만이 아니라 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어야 유지된다. 교과서는 그런 논리를 전파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다. 정당화는 설득으로 되는 것이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되지 않는다.

좌파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이런 진지전에 공을 들였다. 그들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이 민족정신을 강화한다며 국사를 필수화하면서 역사 전공자를 위한 많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 자리가 나중에 야금야금 ‘해방전후사의 인식’류의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 차지가 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아 오려면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은 단기간만 내다봐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지전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대통령 퇴임 후에도 필생의 임무로 여기고 할 생각이 있다면, 그렇다면 해보라.

내 책꽂이에는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발간된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이후로는 새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바꾸는 결정은 김영삼 정부가 내렸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따랐을 뿐이다.

우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좌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이어질 때, 또 좌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우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때 그런 것을 합의라고 부른다. 한국사 교과서 검정화는 교육정책에서 보기 드문 합의의 사례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2012년 새누리당 원내대표로서 국회선진화법을 주도한 사람이다. 그때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그 통과를 추인한 사람이 박 대통령이다. 그들은 합의의 정치를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족보 없는 합의 정치를 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합의나 잘 지키라고 말해주고 싶다.

민주주의 사회에 하나의 올바른 역사는 없다. 하나의 올바른 역사, 즉 정사(正史)는 엄격히 말해 왕조시대에나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긍정하는 한국사 교과서가 사실상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국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검정체제의 합의를 통해 이룩한 진보를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사 교과서#국정화#교학사#검정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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