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296>한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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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황금찬(1918∼ )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모두 한복을 입는데
나만 한복이 없다고 했더니
병처가 큰맘 써 한 벌 했다.

78년 정월 첫날 아침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
백운대와 도봉이
내려다보고 웃고 있다.

어디든 가서
세배를 드리고 싶다.

우이동 계곡으로
발을 옮긴다.
아직도 우리들의 맥박 속에
살아 있는 선열들
일석·의암·해공·유석
무덤 앞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4·19묘소
비문에 새겨진
꽃 같은 나이들을 읽어 본다.
구름이 날린다.
구름에 새 옷깃이 날린다.

이 나이에 비로소
한 겨레 안에 서는
그런 느낌이 든다.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 보니 1978년이면 36년 전이다. 그 시절 선비 스타일 삶이 설날을 배경으로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친구라도 나이 들어 이름을 부르는 건 경망스럽다 여겨서 호로 부르는 점잖은 양반이 ‘모두 한복을 입는데/나만 한복이 없다’고 아내를 은근히 압박한다. 아내에게만은 철부지처럼 풀죽은 모습을 보이고 새 옷을 조르는 것이다. 착한 남편, 여태 내색 한번 안 했지만 그렇게 부러웠구나. 아내는 아무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몸도 아프지만 ‘큰맘’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화자는 두루마기까지 갖춘 ‘한복 한 벌 했다’! 설날 아침 그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백운대와 도봉이/내려다보고 웃고 있’단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입으면 기쁜 건 남녀노소 다를 바 없을 테다. 들뜬 마음에 화자는 ‘어디든 가서/세배를 드리고 싶다’. 그래서 집 가까이 있는 선열들의 무덤도 찾아가고 4·19묘소도 간다. 그 참배는 그전부터도 화자의 설날 행사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하니 더욱 숙연해지고 옷깃이 여미어진다. ‘비로소/한 겨레 안에 서는/그런 느낌이 든다’. 한복을 통해 민족의 피가 뭉클하게 ‘맥박 속에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황금찬 선생님은 현재 한국의 최고령 시인이시다. 그동안 써오신 따뜻하고 순수한 시와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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