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안현수, 개인이 국가를 이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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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가 열린 해에 나는 특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마침 독일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려 편안한 저녁시간대에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 국가대표 선수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를 상대로 2골을 넣어 독일의 2 대 0 승리를 이끌었다. 포돌스키는 골 세리머니도 생략하고 좋아하는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포돌스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해봤다.

지난 주말 안현수 선수가 소치 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개인 1000m 경기에서 1위를 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가족과 함께 지켜봤다. 아내와 애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 기분이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선수 때문에 우리 대표팀 선수가 1위를 놓친 것도, 메달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 선수도 잘하고 안 선수도 잘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안 선수의 역량이 러시아에서까지 인정받은 데 자부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사실 양궁이나 쇼트트랙은 한국인 코치가 외국에 많이 나가 있고 그들이 가르친 팀이 세계 대회에서 우리나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바짝 쫓아올 때는 조바심도 나지만 넓게 봐서는 우리끼리의 경쟁 같은 느낌이 들어 흐뭇하기도 하다.

내가 착잡했던 것은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사람을 쫓아낸 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어느 나라보다 많은 반칙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선수의 경기까지 망치는 우리 팀의 모습이 늘 깔끔하게 경기하면서도 이기는 안 선수의 모습과 대조되는 데다 바로 그런 안 선수가 우리 대표팀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안 선수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빙판을 돌고 시상식에서 러시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는 결코 ‘쿨’하게 축하해줄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포돌스키만 해도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2세 때 독일로 이주했다. 게다가 그의 친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국적을 가졌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2차대전 전만 해도 독일 땅이었다. 포돌스키는 사실상 독일인이나 다름없었고 두 개의 국적에서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서 독일을 조국으로 택한 것이다. 그런 그도 어디선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는 독일과 폴란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말했다. 하물며 안 선수야 어떻겠는가. 안 선수는 러시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러시아어도 잘하지 못한다. 아무리 국경을 초월해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러시아는 그에게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안 선수는 정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빙판에 키스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국가 대 국가라는 맥락을 완전히 떠난 어떤 순간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승리다.

조국은 그저 조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조국인가. 조국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꿈을 실현해 줄 때다. 한국 국적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안 선수의 꿈을 꺾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즉 조국을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흘린 눈물은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여자 친구에게, 부모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빅토르 안은 우리에게 개인이 국가를 이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였다. 지금은 낯선 풍경이지만 체육단체의 관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군 면제나 상금 같은 경기 외 전리품이 남아있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파벌싸움이 벌어지고 승부조작이 일어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빅토르 안을 보게 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안현수#소치 올림픽#쇼트트랙#금메달#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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