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05>잘 가라, 환(幻)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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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환(幻)
―이규리(1955∼ )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휙,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상추쌈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었다 허가 씹혔다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아무 키나 누르면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남은 것 지워질까 봐
노심초사 상추쌈만 꾸역꾸역 넣는다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
환(幻)이라는 것,
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먹은 게 너였나
너가 먹은 건 나였나

가부좌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한 너,
잘 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
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다
여기서부터 가파르다
단물 빠진 거친 밥상 위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깊은 맛은 씹은 뒤에 안다고
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


‘휙, 지나가버린’, 그것은 환(幻)이었을까? 그토록 생생했는데. 믿기지 않고 막막하고 허한 마음으로 화자가 찾아 먹는 건 상추쌈이다. 술이라도 왕창 마시면서 현실을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을 추스르는 화자다. 그것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했을 때도 영원히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은’ 멀쩡한 여인이 환(幻)을 보내는 환멸의 시간. 상추쌈을 먹는 모습은 우아하지 않다. 풀어 늘어뜨렸던 머리칼을 이마에 흘러내리는 곱슬머리도 다잡아서 질끈 묶었으리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볼이 미어져라 상추쌈을 입에 넣고 꾸역꾸역 씹는데 눈물이 난다. 울음과 함께 꿀꺽 상추쌈을 삼킨다. 잘 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라고, 환(幻)과 함께 시절을 떠나보내는 화자의 서글픈 위기감이여.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 상추쌈이여. 이규리는 생활에 기반을 둔, 친근하고 안정감 있는 상상력을 야무지게 펼쳐 보인다. 그래도 당신은 떠나보낼 환(幻)이 있으셨군요.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 아무 희망도 환상도 없이, ‘속치마 레이스’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이 평생을 산 여인도 많답니다. 가령 우리의 어머니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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