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04>꿈꾸는 사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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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업
―정복여(1958∼)

집을 한 다섯 채 지어서 세놓을까
한 채는 앞마당 바람 생각가지 사이에, 한 채는 초여름쥐똥나무 그 뿌리에, 다른 한 채는 저녁 주황베란다에, 또 한 채는 추운 목욕탕 모퉁이에 지어,
한 집은 잔물결구름에게 주고, 한 집은 분가한 일개미가족에게 주고, 또 한 집은 창을 기웃대는 개망초흰풀에게, 한 집은 연못가 안개새벽에게 그리고 한집은 혼자 사는 밤줄거미에게 주어,

처음에는 집세를 많이 받겠다고 하다가
다음에는 집세를 깎아주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그냥 살아만 달라고 하면서
거기 모여 사는 착한 이웃 옆에
나도 그렇게 세를 놓을까


모름지기 시인의 사업이란 이러해야지!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강남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맞은편 빌딩 하나가 내 것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걸 세놓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 거라고. 그 참에, 어느 빌딩이 좋을까 주위를 둘러보며 골라봤었지. 나도 명색 시인인데 망상도 참 지질하고 처량했어라.

화자는 앞마당에 연못이 있고 쥐똥나무 흰 꽃이 향기를 날리는 집에 사나 보다. 어쩌면 다세대주택일지도 모른다. 화자의 집은 ‘개망초흰풀이 창을 기웃대는’ 1층일 테다. 맑은 날 저녁이면 베란다에 곱게 노을 드는 서향일 테다. ‘잔물결구름’ ‘분가한 일개미 가족’ ‘개망초흰풀’ ‘안개새벽’ ‘혼자 사는 밤줄거미’는 화자가 이웃에 사는 이들에게 지어준 별명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빌린 그 별명이 떠올리는 세입자들이 서로 이웃으로 착하게 모여 산단다. 둘째 연에 따르면 집주인도 착한 사람인 다세대주택에. 뭐 요즘 세상에 그런 집주인이 다 있을라고?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집세를 많이 받겠다고 했다가’ 정이 들어 ‘집세를 깎아주겠다고’ 할 수 있고말고. 화자가 집주인이면 당연히 그럴 테다.

정복여 시에는 천진한 우아함이 있다. 맑고 따뜻한 심성이 배어나는 시어들이 꿈꾸듯 다정한 어조로 읊어진다. 이 깔끔한 나른함!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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