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엄마 같은 팬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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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문화부 차장
이진영 문화부 차장
월드스타 비의 전역식은 이름값에 비해 조촐했다. 그는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홍보원 앞에 나타나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는 짧은 소감만 남기고 떠났다. 팬미팅도 인터뷰도 없었다. ‘LTE급 퇴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밤새 비를 맞으며 비를 기다리던 국내외 팬들 700여 명(경찰 집계·팬클럽 ‘구름’은 800명으로 추산)은 1분 남짓의 짧은 만남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비의 ‘조촐한 전역식’은 소속사와 팬카페 임원들의 회동 결과물이다. 이들은 전역을 앞두고 가진 상견례에서 그의 ‘부적절한’ 복무 태도로 여론이 좋지 않으니 전역식은 하되 조용히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요즘 케이팝 팬들은 스타를 따라다니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가수의 활동 방향을 정하는 데 관여하고 홍보에 참여하며 케이팝 산업을 지탱하는 힘으로 존중받는다. 그래서 ‘빠순이’가 아니라 ‘팬덤(팬 집단과 그 문화)’이라고 불린다. 팬덤은 더이상 10대의 일탈적 하위문화가 아니다. 소수의 ‘빠순이’ 출신 대학원생들이 연구했던 팬덤을 이제는 역량 있는 학자들이 파고들어 팬덤이 능동적인 문화 실천이자 중요한 문화 현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본보 6일자 주말판 커버스토리 ‘팬덤: 스타의 하늘’ 참조

팬덤의 위상 변화는 ‘이모팬’ ‘삼촌팬’이라는 주류 세대가 팬덤에 합류하는 시기와 겹친다. 스타를 ‘오빠’가 아니라 ‘우래기(우리 아기)’라고 부르는, 경제력과 사회 경험이 있는 고령의 팬층이 합류하면서 팬덤도 달라졌다. 이들의 구매력은 “동방신기 팬클럽 회원이 80만인데, 앨범 판매량은 10만 장”이라는 식의 조롱을 허락하지 않는다. 법적 분쟁이 있을 땐 법률 자문에 응해주고, 스타와 관련된 온갖 소식을 영어 중국어 일본어 태국어 스페인어로 번역해 인터넷에 올린다. 계층별로 소비하는 문화상품이 달라진다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이론으로는 아이돌에 열광하는 중산층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급문화 소비자가 저급문화도 고루 즐긴다는 ‘옴니보어(omnivore·잡식동물)’ 이론으로 이모·삼촌팬 현상을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팬덤의 연령층이 확대되면서 ‘팬질’이 엄마를 닮아간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우래기의 노래가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음원 사이트의 순위 집계 방식을 스터디한 뒤 음반을 공동으로 구매하고, 우래기 신곡을 주위에 휴대전화 벨소리로 선물한다. 복잡한 입시 정보를 꿰고 앉아 아이의 성적을 관리하는 엄마 같다. TV에 우래기가 ‘남의 애기’보다 밉게 나오면 항의의 뜻으로 인터넷 게시판을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우래기의 각종 기념일이면 선물을 준비하고, 아이 학교에 간식 돌리듯 드라마 촬영장에 밥차를 보낸다. 우래기 이름으로 자원봉사하고, 헌혈하고, 통 크게 우래기 이름을 딴 숲을 해외에 조성한다. 자녀의 봉사활동 스펙을 관리하는 엄마 같지 않은가.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팀은 논문 ‘스타를 관리하는 팬덤, 팬덤을 관리하는 산업’에서 팬덤의 문화 실천을 ‘가족 프로젝트’라고 했다. 스타를 생산하는 기획사는 ‘아빠’, 이를 육성 관리하는 팬덤은 아이의 교육을 책임지는 한국 중산층 ‘엄마’ 같다는 분석이다. 팬덤을 엄마로 놓고 보면 서태지가 불쑥 재혼 소식을 발표했을 때 “우리 생각은 안 해주나”라며 화내던 일부 팬들이 이해가 간다.

빠순이 시절보다 위상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팬덤은 자신들의 활동을 ‘팬질’이라 부르며 여전히 부끄럽게 여긴다. “그 열정을 생산적인 일에 쏟아보라” “극성스럽다” “배타적이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놓고도 내 아이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치맛바람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못하는 엄마 같다.

케이팝 한류의 동력인 팬덤이 스스로도 떳떳한 문화행위가 되려면 한국 팬덤 특유의 ‘모성애’를 극복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케이팝#한류#팬덤#고령의 팬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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