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의원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2002년엔 직접 대통령이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놓쳤다. 재벌이란 자리를 과감하게 버리지 않았던 게 큰 이유라고 본다.
그해 11월 17일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 보유주식(당시 시가 1800억 원)을 금융기관에 신탁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재산을 은행에 맡겨놓았다가 퇴임하면 되찾겠다는 것으로 ‘재벌→대통령→재벌’ 순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다 갖겠다는 거잖아!” 국민은 감동하지 않았다. 금력과 권력을 한 사람에게 다 줄 수는 없다는 게 국민의 정서였다. 결국 그는 일주일 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버릴 것조차 별로 없었던’ 노무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가정법이지만 정 의원이 그때 재벌을 버렸더라면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대통령보다 재벌을 선택했다. 재벌은 대통령 하면 안 되나? 틀린 말은 아니나 결정은 어디까지나 국민이 하는 것이다. 최근 세 차례 대선에서 ‘기호 2번’의 손을 계속 들어준 국민의 속뜻을 읽어야 한다. 의회권력을 가진 쪽(기호 1번)에 청와대까지 맡기진 않은 것이다.
야구로 치면 박근혜 후보는 8회까지 앞서다 9회에 느닷없이 초비상이 걸렸다. 국민은 왜 막판에 와서 그에게 표를 줄까 말까 망설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우리나라가 왕조국가도 아닌데 왜 하필 ‘대통령의 딸’이 또 대통령이 돼야 하나. 박 후보는 철저하게 버림으로써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아버지 시대의 과(過)에 대해 뒤늦게 떠밀리듯 사과했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 더 많다. 한마디로 덜 버렸다는 것이다.
‘재벌의 아들’과 ‘대통령의 딸’.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 힘으로 이룬 게 아니라 아버지 잘 만나 그냥 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 엄청난 기득권을 부여잡은 채 대통령까지 하겠다고 하니 국민은 주저할 수밖에.
요즘 박 후보가 사람 모으는 걸 보면 버리기는커녕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십 년간 정치권에서 권력을 좇던 사람, 밖에서 그런 정치권을 비판하던 사람, 정치에 초연하던 기업인과 이른바 사회원로들…. 대부분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이분들이 언제부터 통합에, 권력에, 자리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싶다. 캠프를 사람들로 꽉꽉 채운다고 표도 채워질까.
캠프에 영호남사람 몇몇 섞는다고 통합이 되고, 재벌과 서민을 한데 모은다고 양극화가 해소되나. 선거 끝나면 다 어떻게 보은하려고 그러는지 걱정이 앞선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박 후보는 ‘선거의 여왕’이었다. 차떼기당과 탄핵역풍으로 참패가 확실시되던 2004년 총선에선 수백억 원짜리 호화 당사를 버리고 천막당사를 차렸다. “가진 것 다 버리겠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통해 121석으로 당을 기사회생시켰다. 패배가 예상되던 올해 4·11총선에선 당명도 특권도 다 내던지고 “한 번만 더 살려달라”고 해서 또 당에 승리를 안겼다.
그런 그도 정작 자신의 선거에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오로지 채우려고만 한다. 버릴 건 많다. 구시대 인물, 비리 전력자, 호가호위하며 작은 권력을 즐기는 일부 측근, 아버지 시대의 그림자, 불통(不通) 논란을 불러온 박 후보 자신의 업무 스타일….
고대 중국에서 내려오는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이 있다. 7할 넘게 부으면 모두 다 밑으로 흘러내려버리는 묘한 잔이다. 박 후보 자택에도 있다 하니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다 가지려 하다간 자칫 다 잃는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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