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김장훈과 실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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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씨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힘을 일깨우는 범종이고 노래였습니다. 그런 그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지요? 대범하지 못하게 그만한 일로 무슨 상처냐, 툭툭 털고 일어나야지, 하고 충고하는 사람은 통 큰 사람이라기보다 무딘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툭툭 털고 일어나 화해를 청하는 사람은 분명히 통 큰 사람입니다.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탈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살다 보면 상처 입을 일이 많지요? 세상은 넓고, 그 넓은 세상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으니까요. 그리고 또 의도치 않게 상처 내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상처 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인간이니 또 어쩌겠습니까?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의혹이라는 놈이 찾아와 분노의 불을 지피며 당신을 고통의 화택(火宅)으로 만들 때, 물이 끓듯 화가 끓고, 기름이 끓듯 속이 들끓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불편하고 역겨운 사람과 상황을 그저 꾹 참고 견디십니까, 아니면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며 맞서 싸우십니까?

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만의 동굴로, 침묵으로 도망갑니다.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만나면 만날수록 오해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만 부풀어 오릅니다. 만나서 풀리지 않을 때,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의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게 좋습니다. 기대와 평판으로부터, 윤리와 의무로부터, 사람과 소문으로부터 완전히 혼자가 되어 마침내 내가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말입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그 시간이야말로 신 앞에 단독자로 서있는 시간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신 앞에 선 단독자의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신이 명하자 아브라함은 이유도 모른 채, 아니, 이유도 없이 늦게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 하지요? 신의 제단에 자식을 바치는 설화는 종종 있습니다. 승전을 위하여, 공동체의 안위를 위하여!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엔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그건 공동체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아들을 위해서도, 심지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것, 그래서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지 않나요? 창세기는 그런 것을 신의 명령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공포와 전율’에서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위해 울 수가 없다”고. 아니, 모리아 산에서 아들에게 칼을 들이댔던 그 행위가 알려질 경우 아브라함은 멀쩡한 아들을 죽이려 한 미친 아버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키르케고르는 신의 제단에 아들을 바치러 가는 아브라함에게 매료되었던 걸까요?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게서 실존적 고뇌의 정수를 보았습니다. 상식으로도, 이성으로도, 사랑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그렇다고 비상식으로도, 감성으로도, 증오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생의 진실 말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하지요? 성숙의 내면성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처럼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고독한 사태를 경험하며 성장합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삶의 고유성이 생기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김장훈#철학#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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