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쟁론]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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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이달 16일 새누리당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5·16은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아쟁론 3회 주제는 ‘한국사에서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상반된 견해입니다. 긍정적 관점과 부정적 관점을 피력한 두 분의 글을 읽다 보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지난 역사에 대한 다양한 안목을 갖게 됩니다. 동일한 사안을 이렇게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 “5·16은 위로부터의 혁명” ▼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한마디로 5·16은 쿠데타로 시작되었지만, 혁명으로 종결된 정치현상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변화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 변화다.

한때 쿠데타는 세계 곳곳을 휩쓴 유행병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속 가능성을 획득할 정도로 국민들 삶의 일부가 된 쿠데타는 거의 없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지역에서 수많은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얼마 안 돼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5·16은 다르다. 5·16은 쿠데타지만, 시종일관 쿠데타의 범주에만 가두어 둘 수 없다. 5·16을 민주질서를 정지시킨 범인으로 지목해 철창에만 가두어 둔다면, 독수리를 새장에 가두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지금 누가 ‘보릿고개’, ‘절량농가’란 말을 알아듣는가. 이런 말들은 잊혀진 언어가 되었고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은 더이상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더욱이 너나 할 것 없이 ‘앵그리(angry) 사회’의 신드롬을 곱씹고 있는 요즈음 ‘헝그리(hungry) 사회’를 극복했다는 것이 큰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기적을 만들고 있다는 소명의식을 가졌고 경제적인 성취만이 아니라 잠자던 민족역량이 깨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신감은 자기 확장성을 가져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모든 것에 도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5·16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왜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인색한가.

혁명이란 명실공히 큰 변화다. 혁명에는 밑으로부터 분출되는 대중혁명이 있다. 4·19혁명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혁명만이 다는 아니다. 위로부터의 혁명도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을 보라. 쿠데타로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그가 이집트에서 이끈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혁명이라고 부른다. 5·16은 그런 점에서 혁명이고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5·16을 정당화하면 다른 모든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일리는 있지만, 진실을 비켜 간 기우다. 쿠데타가 혁명이 된 사례는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했지만, 5·16이 그런 것이다.

5·16의 특이성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점에 있다. 5·16은 절대빈곤의 종결자가 됨으로써 중산층을 두껍게 했다. 이 중산층은 한국 민주주의의 등뼈가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해 꺼질 줄 모르는 열망을 가진 중산층을 배출함으로써 5·16은 민주주의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서슴없이 12·12사태를 단순 쿠데타로 단죄할 수 있게 됐고 6·10민주항쟁도 성공할 수 있었다. 만일 권력 탐욕만으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는 속물형 쿠데타로 5·16을 평가한다면, 5·16에 대한 모욕이다.

물론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민주질서를 훼손한 것, 인권을 탄압한 것은 결코 작은 허물이 아니다. 성취가 있다고 해서 눈물과 고통을 상쇄할 수 있겠는가. 인권 침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5·16이 혁명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5·16으로 시작된 박정희 시대를 총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밝은 면만 보며 용비어천가를 불러도 안 되지만, 시종일관 쿠데타로 비하하면서 을씨년스러운 모습만 떠올리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니다. 공과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 정직한 태도다. 이 공과를 평가하는 데 의미 있는 자료가 있다.

우리 국민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할 때마다 박정희를 항상 1위에 놓는다. 왜일까. 쿠데타의 주역으로 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근대화 혁명의 주역으로 보기 때문인가. 만일 박정희를 민주주의를 파괴한 쿠데타의 주모자로만 보았다면 민주화시대에도 이 시들지 않는 인기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점에서 공과를 가늠한다면 박정희는 ‘공(功) 7, 과(過) 3’의 정치인이다. 원래 이 말은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평가할 때 사용했다. 그러나 마오의 경우 문화대혁명을 통해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고 고통을 강요받았다. 박정희는 그런 정도로 잘못을 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보다는 좀 더 나은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4·19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면, 5·16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4·19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분출했다면 5·16은 근대화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분출했다. 이 두 개의 혁명이 어우러져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박정희 시대의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 새삼 중요해지는 이유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 필자 소개 ::

서울대 국민윤리교육학 석사를 거쳐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전 공동대표이자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이며 현재 박근혜 의원 대선경선캠프인 ‘국민행복캠프’ 정치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있다.
▼ “민주주의 짓밟은 쿠데타”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무릇 모든 정권은 정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고, 어머니가 용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왕의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왕들은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합리적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은 이런 이야기들이 단지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정권의 정통성은 국민의 선택 위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근대 정치의 꽃이면서, 근대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원리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적 수단을 통해 수립된 정부라고 해서 모두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이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모두 민주주의적 선거를 거쳐 집권했지만,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일으켰고, 독일과 일본은 패망의 길을 걸었다.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집권하는 사례도 있다. 바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부다. 한국의 5·16쿠데타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에서 소수의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것은 쿠데타 당시의 정부가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었으며, 국민이 원하는 바를 빨리 달성하기 위해 쿠데타라는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5·16쿠데타로 수립된 군사정부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불법적 쿠데타로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낸 다른 나라의 사례를 제시했다. 특히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는 박정희에게 가장 인상적인 역사적 선례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단기간에 걸쳐 국력을 배양하고, 일본과 이집트가 세계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세르는 얼마 전 실권한 리비아의 카다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메이지 유신과 이집트의 나세르,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한국의 박정희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쿠데타라는 불법적인 과정을 거쳐 집권했기 때문이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국민의 지지를 얻기 힘들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또 다른 쿠데타에 의해 실각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맞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2년 사이에 군사정부를 다시 전복하려는 또 다른 쿠데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1964년 6·3사태 때에도 또 다른 쿠데타 정보가 보고됐다.

메이지 정부는 급속한 성장으로 나타난 부작용을 미봉하기 위해 외부로의 팽창을 시도했다. 오키나와를 합병하고, 대만과 한국을 식민지화했다. 그리고 쇼와 시대에는 결국 아시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사다트와 무바라크로 이어지는 전체주의 기간을 거치며 한 사람은 암살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집트 시민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한국의 5·16쿠데타 세력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20여 년 동안 급속한 성장을 밀어붙인 결과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1969년의 외환위기와 부실기업 문제는 1972년 8·3조치로 미봉되었지만, 1970년대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과잉투자로 1970년대 말 한국 사회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았다.

허약한 금융기관과 정부의 보조금으로 연명한 재벌은 개방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또 박정희 정부 시대 20년 동안 한국 사람들은 항상 안보위기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안보위기는 민주주의 대신 국민을 억지로 통합하기 위한 무기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는 안보불감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정희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했던 쿠데타가 다른 쿠데타를 부르는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며,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1963년 군복을 벗으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후배들은 쿠데타를 하면 쉽게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단과 과정이 잘못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난다. 또 수단과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고 결과만을 평가할 때 또 다른 불법적 수단과 과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법적 수단이 합법적 수단보다 더 쉽게 결과를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만약 수단과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잘살기 위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더 좋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필자 소개 ::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연구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퍼시픽 어페어스(Pacific Affairs)’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5·16#역사적 평가#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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