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에서 2021년 발굴된 초대형 ‘주먹찌르개’. 길이 10~20cm가량의 일반적인 양면석기(오른쪽 사진)에 비해 2배 이상 큰 42cm 크기다.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에서 2021년 발굴된 초대형 ‘주먹찌르개’. 길이 10~20cm가량의 일반적인 양면석기에 비해 2배 이상 큰 42cm 크기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최근 본 유물 중 가장 흥미롭고 신기한 유물이라면 단연코 길이 42cm의 초대형 석기다. 대략 20만 년 전 경기 연천군 전곡리 지역에 살던 초기 인류가 만든 이 석기는 땅속에 묻혀 있다가 2021년 발굴돼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은 전곡선사박물관 개관 15주년 기념전 ‘땅속의 땅, 전곡’의 주인공으로 전시되고 있다.
보통 석기라고 하면 한 손에 쥐고 쓸 수 있어야 하기에 크기가 10∼20cm 정도다. 그런데 전곡리 석기는 일반적인 석기보다 두 배 이상 크고, 무게도 9.6kg으로 상당하다. 생김새는 주먹도끼처럼 보이지만 끝부분이 더 뾰족해 뭔가를 찌르는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먹찌르개’라는 별칭도 있지만 거대한 크기와 무게 탓에 실제로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이 석기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주먹찌르개로 알려졌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토된 52cm짜리 주먹도끼가 2023년 학계에 보고되면서 기존 타이틀은 내려놓게 됐다. 그럼에도 이례적이라 할 만큼 거대해 이 앞에 서면 “20만 년 전 전곡리 구석기인들은 왜 이렇게 실용성이 떨어지는 석기를 공들여 만들었을까?” 의문이 든다.
들지도 못할 거대 석기 만든 이유
여기서 잠깐, 석기 제작 과정이 숙련된 기술과 함께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석기로 쓸 돌은 강돌이나 자갈돌같이 아주 단단하면서도 깨지면 날카로운 날이 서는 돌이다. 이런 돌을 원하는 모양으로 깨는 일은 쉽지 않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한 석기로 알려진 주먹도끼의 경우 묵직한 강돌을 수십에서 수백 번 강한 힘으로 내리쳐야 원하는 형태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주먹도끼를 제작하는 동영상을 찾아보면 숙련된 실험고고학자가 침착하게 돌을 돌로 타격해 가면서 형태를 잡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상당히 힘있게 내리쳐야 돌이 깨져 나가는데, 이때 조금만 삐끗해 다른 쪽 손을 때린다면 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기에 매 순간 긴장감이 흐른다.
물론 석기를 제작할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제대로 된 돌을 찾는 일이다. 초대형 주먹찌르개는 이 점에서도 독특한데, 전곡리 한탄강 주변에 흔치 않은 화강편마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돌은 규암이나 현무암처럼 한탄강의 다른 돌보다 더 단단해 다루기 까다롭다. 전곡리 구석기인은 애써 크고 다루기 힘든 돌을 골라 초대형 석기를 제작한 셈이다.
발굴된 주먹찌르개의 날 부분을 현미경으로 분석해 보면 일부 사용 흔적도 보인다고 한다. 이 경우 뭔가를 내려치거나 모루처럼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무게나 크기 면에서 실용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기술이나 힘을 과시하는 위세 용도 또는 의례용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유혹의 도구, 기술력 과시의 상징?
프랑스에서 출토된 9개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실용적인 필요성을 뛰어넘어 대칭적인 면과 모서리를 만들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DB·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케임브리지 고고학인류학박물관주먹도끼나 주먹찌르개처럼 양날을 다듬어 쓰는 양면석기는 대부분 20cm를 넘지 않고, 아주 드물게 30cm를 넘었다. 이런 대형 석기의 등장을 근거로 제기된 이론 중 가장 파격적인 이론이 ‘섹시한 주먹도끼 이론(sexy hand-axe theory)’이다.
진화생물학자 머렉 콘은 1999년 주먹도끼 제작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이성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 주먹도끼를 필요 이상으로 정교하고 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주먹도끼를 잘 만들 수 있는 남성이라면 그만큼 힘과 솜씨, 그리고 머리도 좋다는 증거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시사회에서 주먹도끼를 잘 만드는 남성이 ‘뇌섹남’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발표 이후 일종의 성(性)결정론으로 비판받았지만, 석기를 단순한 기능적 도구가 아닌 사회적 매개물 또는 상징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열었다. 실제로 주먹도끼를 자세히 보면 필요 이상으로 대칭성이 강조돼 있다. 찌르거나 베는 역할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대칭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특히 30cm 정도의 대형 석기는 미적 대상이나 기술력 과시를 위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인들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도구로만 석기를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 간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 초대형 석기를 함께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고,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석기를 크고 완벽하게 만들려 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현대인이 뭔가를 꾸미듯 구석기인들이 석기를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같은 이유일 수도 있다.
석기시대가 결핍의 시대였을까
그런데 석기시대라고 하면 인류가 사냥감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고 열매와 뿌리를 먹으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던 결핍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엄포한 것도 석기시대를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의 시대로 봤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이에 대해 현대인의 완전한 오해라고 비판한다. 먼저 그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수렵채집경제의 석기시대에 적용하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구석기 인류는 도리어 욕망을 제어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풍요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부시맨이나 호주 원주민 애버리지니는 구석기인과 유사한 수렵채집경제를 유지한다. 이들의 삶을 연구한 결과 석기시대인들은 평균 하루 4∼5시간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낮잠을 자거나 사교·여가 활동을 하며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워라밸이 탁월한 것이다. 이들은 좀 더 일하면 좀 더 풍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이것이 자연과 자신의 체력을 소진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절제했다고 한다.
사실 구석기인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슈퍼마켓과 같은 세계였다. 이들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밀이나 쌀 같은 곡류를 주로 섭취했던 신석기인보다 영양 상태도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살린스는 수렵채집의 석기시대를 ‘원초적 풍요 사회’라고 규정했다.
살린스의 연구는 현존하는 수렵채집인 중에서도 일부만 연구해 그것을 전체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석기시대인들도 생계에만 매달리지 않고 놀거나 쉬는 걸 좋아했고, 이 과정에서 뭔가를 꾸미고 때론 엉뚱한 일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 덕분에 석기도 점점 더 다양하게 변하면서 사회적 또는 상징적 가치까지 지니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풍요로운 강가에 모여든 구석기인
영국에서 출토된 웨스트 토프츠 주먹도끼. 중앙을 조개 화석으로 장식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DB·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케임브리지 고고학인류학박물관여기서 왜 전곡리를 중심으로 구석기 유적이 몰려 있는지도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한반도 전역에 1000여 곳의 구석기 유적이 존재하는데, 그중 전곡리 주변에 25곳 이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발굴된 유물의 양도 풍부해 이 일대는 한국 구석기 연구의 메카로 불린다. 약 2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암 위에 퇴적층이 잘 보존된 덕분에 유적이 잘 보존됐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이 다른 곳보다 풍요로운 곳이라 구석기인이 많이 모여들었고, 결과적으로 유적이 많이 전해지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구석기 유적 답사 중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프랑스 남부 베제르 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의 중심지 레제지는 ‘세계 선사시대 문화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구석기 유적이 풍부하다. 막상 현장에 가보면 독특한 지형에 눈길이 간다. 석회암 대지를 강물이 오랫동안 침식하면서 생긴 깊은 계곡이 인상 깊다. 이 협곡을 가로지르는 강은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풍부한 식수를 제공했을 것인데, 특히 물을 찾아 이 협곡 안에 들어온 동물들은 원시 인류에게 좋은 사냥감이 됐을 것이다. 참고로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선사 유적지는 바로 라스코 동굴벽화다.
한탄강 주변의 주상절리 풍경도 독특하다. 지질은 다르지만 계곡 사이로 강이 흐른다는 점에서 베제르 계곡과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면 한탄강 주변에서도 라스코 동굴벽화의 한 장면처럼 여러 동물이 끝없이 줄지어 다니지 않았을까? 그리고 동물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적지 않은 구석기인들이 전곡리 주변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초대형 주먹찌르개 같은 실험적인 석기도 ‘원초적 풍요 사회’였던 전곡리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석기시대는 유물과 유적이라는 과학적 자료와 함께 인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강하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느 시대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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