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김정은이 트랩에서 내리는 날

  • 동아일보

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냉전이 한창이던 1979년 미국 덴버대 대학원생 콘디는 박사논문 작성을 위해 소련에서 7주간 현지조사를 했다. 모스크바 거리에선 소련군 총참모부 건물의 창문 수를 일일이 셌다. 이를 토대로 베일에 가려진 소련군 총참모부에 대략 5000명이 근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10여 년 뒤 콘디는 전직 소련군 수뇌를 만나 총참모부 인원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의 답은 “약 5000명”이었다.(안토니아 펠릭스 저 ‘콘디’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대 중반 박사과정을 밟던 시절의 얘기다. 그나마 라이스의 경우엔 단편적 성과라도 얻었지만 소련 연구자들은 미확인 첩보와 소문, 역정보 속에서 헤매야 했다. 그래서 소련 연구는 크렘리놀로지(Kremlinology)로 불렸다. 비밀에 싸인 크렘린궁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공개 사진에서 사라진 인물, 퍼레이드 행사에서 드러난 권력서열, 간행물에 나타난 새로운 어휘 등 토막정보로 행간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북한 연구는 크렘리놀로지보다 한층 더하면 더하지 나은 게 없다.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의 폐쇄적 통치 스타일, 베일에 가려진 정책결정 과정, 공개 자료와 대내 자료의 이중성 탓에 북한의 실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루머와 진실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 한다. ‘키몰로지(Kimology·김씨 왕조 연구)’라는 신조어라도 나올 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까지 이어진 북한의 3대 세습 즉위식 행사는 북한 연구자들에겐 평양 권부의 속살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록 잘 짜인 각본과 부단한 연습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 거대한 연극이었지만 북한의 초청을 받은 외국 기자들은 장거리로켓과 인공위성을 구경하고 김정은의 모습도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김일성광장 주석단 무대에 올라 TV 생중계를 통해 육성을 공개한 새 지도자 김정은의 연설은 흥미로운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 정보당국과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음성을 듣고 그의 심리상태 분석에 들어갔고, 열병식에서 군부 측근들과 이야기하는 김정은의 입 모양을 보고 대화 내용을 파악하는 독화술(讀話術)까지 동원했다.

물론 ‘극장국가’가 잠깐 선보인 단막극으로 김정은 체제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련의 행사가 불안정한 권력승계기에서 서둘러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은 분명하다. 새롭게 ‘단숨에 기질’을 내세운 권력승계 속도전, 바리톤 음색과 건들거리는 몸짓까지 할아버지를 흉내 내려 애쓰는 김정은의 모습에선 그만큼 취약한 권력기반을 감지하게 된다.

반면 김정은이 이번에 보인 파격 행보는 자신감의 표출로도 읽힌다. 장거리로켓이 공중 폭발한 직후 북한이 실패를 시인하는 모습에선 투명하고 합리적인 새 체제가 나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갖게 한다. 북한도 김정은의 무대 연기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듯하다. “남녘 인민들도 ‘김일성 주석님의 환생’이라고 찬탄하고 있다”며 속내를 드러냈으니 말이다.

어쨌든 김정은의 무대 출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북한은 지난 주말 김영일 노동당 비서를 급히 중국에 보냈다. 로켓 발사 강행에 화난 중국을 달래면서 김정은의 방중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머지않아 김정은이 베이징 공항의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도 상상해 봄 직하다. 열차만 고집하며 잠행하던 김정일과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북한#세습 즉위식 행사#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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