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8>‘호남 정자의 원형’ 면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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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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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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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과 인간의 끝없는 변화를 살피고 그 흐름을 읽어 내려는 호남 유림의 철학적 사유가 건축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호남의 정자고, 호남 가사문학의 요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는 뜻을 가진 면앙정은 송순(1493∼1583)이 1533년에 지은 정자다.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보면 ‘우러러(仰)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숙여서(俯)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송순은 이 두 문장의 첫 글자를 따오면서 부(俯)자를 같은 ‘숙이다’는 의미인 면(면)자로 바꾸어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고 보니 맹자의 원래 의도인 자기성찰의 의미보다는 좀 더 호방하고 유쾌한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호남의 유림들은 철학자보다 문학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면앙정은 정말 호쾌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에 오르면(호남의 정자는 대부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다), 영산강과 만나러 가는 오례천이 동서로 흐르고, 그 너머로 곡정들판이 눈이 모자라게 펼쳐져 있다.

먼저 면앙정 현판부터 예사롭지 않다. 당대의 명필 성수침의 글씨고, 그 왼편 마루에 붙은 편액에 있는 ‘면앙정 삼언가’는 송순이 지은 것이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그리고 이 시가 그대로, 이후 호남 정자의 설계도가 되었다. 주변의 풍경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고, 천지간에 내가 있듯이 좌우의 마루에 방이 있는 정자. 이 설계도는 그대로 임억령의 소쇄원 광풍각에서, 김윤제의 환벽당에서, 오희도의 명옥헌에서 각각의 땅의 논리에 맞춰 변주되었다.

집 바깥의 자연을 경영하는 수법들은 모두 다르지만, 집 자체에서 정면 세 칸에 가운데 한 칸을 방으로 꾸미는 것은 똑같다. 정자의 설계도뿐만이 아니라 송순의 ‘면앙정가’는 이후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집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면앙정은 오례천을 따라가다 제월산의 끝이 곡정들과 만나 절벽으로 떨어지는, 그 꼭대기로 오르는 길을 충분히 음미해야 한다.

송순이 이 땅을 살 때, 땅 주인은 이곳에서 옥대를 두른 학사들이 노니는 꿈을 꾸고 아들들을 교육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인은 따로 있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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