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지원림]지적도, 100년前 일제때 것 아직까지 쓰다니

  • 동아일보

지원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원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에 사는 김모 씨는 아버지 때부터 90년 넘게 살아온 단독주택이 낡아 새로 짓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지으려고 측량을 하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땅의 경계가 옆집을 2m 정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옆집도 그 옆집을 똑같이 침범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최악의 경우 집을 못 짓거나 소송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웃과 잘 합의돼 무마됐다.

이런 문제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을 전체의 땅이 지적도와 맞지 않는 ‘집단 불부합지’도 있다. 경남 사천시 사천읍 수석1동은 모든 건물이 동쪽으로 밀려나 있다. 집집마다 수십 m²씩 땅이 물려 있다 보니 주민들의 불편과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을 사고팔 수 없고, 증개축도 못한다. 내 집인데도 재산권 행사를 못하는 셈이다. 게다가 수십 년간 소방도로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화재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불부합지로 인한 피해는 공공부문에도 나타난다. 택지개발사업이 지연되거나 도시계획도로를 개설하지 못하기도 하고 지도 제작의 부실도 초래된다. 지난해 12월 개통된 거가대교의 경우 측량 기준점인 거제도 국가수준점과 진해 국가수준점 간 절대 표고차가 37cm 발생해 교량과 침매터널 시공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충북 청주시는 몇 년 전 상당구 내덕동 일원에 도시계획에 따른 소방도로를 개설하려고 했으나 상당 부분이 사유지와 겹쳐 있어 도시계획선에 저촉된 땅을 전량 매입하고서야 도로를 개설할 수 있었다.

이런 피해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재 전국 필지의 15%가량이 문제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측량을 할수록 불부합지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이 많은 서울 강북의 경우 30% 이상이 불부합지로 추정된다.

국토해양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내 땅의 경계를 확인하는 측량비용만 연간 770억 원 정도 된다. 토지 분쟁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연간 수천억 원에 이른다. 여기에 사회갈등 유발, 국가 정책사업 지연, 공간정보산업 발전 저해 등의 문제가 따른다. 국제적으로 영토 분쟁을 유발할 수도 있다. 우리 국토가 국제표준 좌표계(세계측지계)보다 동쪽으로 464m나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독도 영유권 같은 국가 간 분쟁이 불거질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방치하다간 사회적 국가적 혼란마저 우려되는 심각한 상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낡아빠진 지적도를 지금까지 사용하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당시 일본은 토지 수탈과 세금 징수를 위해 대나무줄자, 연필, 한지 등 전근대적인 측량장비와 기술을 사용해 지적도를 만들었다. 서둘러 측량을 하려고 측량 기준점도 도쿄(東京)원점에서 따왔다. 게다가 땅의 경제성에 따라 500분의 1부터 6000분의 1까지 7종류의 축척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도 지역마다 축척이 서로 달라 지적도를 연결하면 맞지 않는다. 또 8·15광복과 6·25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며 지적도가 소실되고, 건물이 무단 신·증축되고, 국토가 변형됐다.

정보기술(IT)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국가 토지행정과 자본주의 발전의 근간이 되는 지적도를 왜 이 지경까지 방치했을까. 책임을 물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더 늦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지난달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이 발의한 ‘지적 재조사 특별법’ 제정 움직임에 주목한다. 우리의 첨단 디지털기술로 국토를 재측량해 100년 만에 지적제도를 확립하는 일은 시대적 과제다. 부끄러운 일제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 지적 주권을 확립하고, 국토의 경계를 반듯하게 바로잡고, 미래 신성장동력인 공간정보산업의 인프라를 조성하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 더 지체돼서는 안 된다.

지원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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