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을 일본에서 따로 편성한 10군단에 맡겼다. 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은 뒤에는 응당 지상군 지휘권을 통일해야 하는데도 맥아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으로 진격할 때 서로 경쟁을 시키려고 8군은 평안도로, 10군단은 함경도 쪽으로 나눠 올라가게 했다.
펑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 허점을 이용했다. 경계가 허술한 8군과 10군단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대부대를 침투시켜 퇴로를 차단한 다음, 앞에서 더 큰 부대로 밀어붙이는 포위전술을 구사했다.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속절없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미군 역사상 최대 패전인 1·4후퇴였다.
충격을 받은 맥아더가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주장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해임하고 리지웨이 대장을 후임자로 임명했다.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있던 리지웨이는 즉각 10군단을 8군 아래로 편입시켜 지상군 지휘권을 통일하고, 전 지상군을 한꺼번에 진격시키는 ‘손에 손잡고 작전(Operation Hand in Hand)’을 펼쳐 경기 장호원까지 내려와 있던 전선을 나중의 휴전선 근처로 다시 밀어 올렸다.
6·25전쟁 이후 한국 육군은 1군은 전방을, 2군은 후방을 담당하는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1974년 주월(駐越)사령부가 돌아오자 전방을 둘로 쪼개서 서부는 3군에, 동부는 1군에 맡겼다. 수도권 방어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베트남 전선에서 막 돌아온 장성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이유도 있었다. 지휘권의 맹점 노출이 불가피했다. 북한군이 이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를 겸하는 주한미군이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모두 갖고 있어 북은 감히 전쟁을 도발하지 못했다.
나뉜 지상군 사령부를 다시 합치려고 한 것은 김대중 정부였다. 1998년 4월 김대중 정부가 1, 3군을 합쳐 지상작전사령부(지작사·地作司)를 만들겠다고 하자 실전 경험이 많은 미군들로 편성된 한미연합사는 즉각 찬성했다. 한국 육군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나왔으나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후 지작사 창설은 국방개혁의 핵심이 됐다.
지작사를 창설하게 되면 현 3군사령부가 지작사로 바뀌어 전 지상군을 지휘하고 1군사령부는 해체된다. 이렇게 되면 1군사령관(대장)을 비롯한 1군의 보직이 사라져 육군 장성 수가 크게 줄어든다.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안에서 말하는 ‘장성 정원 15% 감축’도 1군사령부 해체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지작사 창설안은 이상하게도 계속 연기돼 왔다. 2010년으로 잡았던 목표연도가 2012년, 2015년으로 계속 늦춰졌다.
그러는 사이 국방부는 국군수송사, 국군의무사(醫務司)를 만들었고 앞으로 국군교육사와 국군군수사(軍需司)를 또 창설하겠다고 한다. 전투에서 이기는 군대를 만들려면 작전과 무관한 부대는 최소로 줄이고 작전부대는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개편해야 하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작사 창설이 자꾸 늦어지는 것은 장성들의 이기주의 탓이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우리 군은 ‘미군 뒤에 숨어서 자리싸움이나 하는 군대’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이다. 국방개혁을 위해서는 지작사 창설을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 자리에 연연하는 군인들로 작전에 강한 군을 만들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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