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미안하다, 사랑한다

  • 동아일보

내 깐엔 ‘마지막 애국심’ 비슷한 사명감이 있었다. 거창한 말부터 끄집어내 독자들께 죄송하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마음속의 자부심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법 아닌가 하고 스스로 둘러대 본다.

각오만 거창한 게 아니었다. 세종시의 자족(自足) 논란을 보더라도 모든 것은 결국 인구 문제로 귀결된다고 결론짓고, 프레임을 ‘21세기 대한민국의 신(新)인구론’으로 잡았다. “2305년이면 코리아의 인구가 ‘0’이 돼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나라가 될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인구학 교수인 데이비드 콜먼이 이런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게 벌써 7년 전 아닌가. 누구 말처럼 한반도가 2100년엔 삼국시대, 2200년엔 부족국가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훨씬 일찍 한일합방(韓日合邦)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자 조바심이 솟구쳤다. 한일 양국은 출산에 관한 한 꼴찌에서 1, 2등을 다투는 나라. 국민이 없어져 국가가 소멸하는 것보다는 합방으로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0년 전과 같은 강제병합이 아니라 두 민족의 생존필요에 의한 ‘합방’이니 시비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인간게놈연구회(HUGO)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 차이는 4.2%로, 전체 인류 안에서는 마치 형제라고 할 만큼 유전자가 비슷하다고 하니 더 말할 게 뭐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각오와 구상 아래 창간 90주년 연중 기획시리즈 ‘아이와 함께 출근해요’를 시작했다. 일단 일하는 여성의 보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현실 진단 때문이었다. 시작은 직장보육시설로 미미하지만 나중은 국가 미래전략으로 창대하게 끝내리라 내심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육시설이 대안이다’(2월 6일자 A4, 5면)를 끝으로 시리즈 1부(출산이 짐 되는 사회)를 마친 지금, 몸과 마음을 휘감아 도는 것은 자족감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연민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출산의 미래에 대한 관념적 문제인식만 있었을 뿐 정작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관해서는 진짜 ‘쥐뿔’도 모르고 있었다.

‘육아 스트레스에 정신과 의사인 나도 정신과 찾아가’(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의 신의진 교수), ‘아이 있다고 출장 배제…야근 자원하며 버텼지만 끝내 사표’(전 KBS 아나운서 오영실 씨), ‘새벽 을지연습 때 세 살 딸 업고 출근…초소에 세워두기도’(서울지방경찰청 여성기동대 김상희 대대장). 시리즈의 제목만 일별해도 한숨이 나왔다.

며칠 전, 본보 시리즈 주인공들이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만나 신문에서 못다 한 얘기를 쏟아내자 전 장관은 “정신이 번쩍 든다”고 토로했다. 그녀 자신도 1남 1녀를 둔 워킹맘이었다. 현재는 저출산대책 주무장관이고. 그런 전 장관도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할 만큼 워킹맘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한 ‘시시포스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나는 현실감 없는 저출산 담론에만 빠져 있었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같은 헛똑똑이들임을 알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워킹맘들에게 지금 당장은 이 말밖에 해줄 수 없지만 시리즈가 끝날 무렵엔 ‘희망 한 단’이라도 건네줄 수 있기를 빌고 또 빈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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