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이니 뭐니 요즘 난리를 치지만 텔레비전 화면이 볼썽사납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말해도 들어 먹히지 않고 규제를 해도 잠시 반짝이다. 하고많은 나랏일을 따져야 할 국정감사장에서 개그맨의 거취를 논하는 지경이니 그 영향력은 어지간한 국가대사를 넘어선다. 바야흐로 연예의 시대다.
그럼에도 주변에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다는 사람이 꽤 된다. 볼 시간이 없기도 하고 볼 내용도 없기 때문이란다. 학생들은 더욱 그렇다. 중고교생은 학교수업에 학원에, 대학생은 스펙 만들기에 토익학원에 시간이 모자라는 판이다. 그래도 다들 텔레비전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안다. 젊은 층의 정보 획득 주 통로가 된 포털에서 이용의 반을 차지하는 내용이 연예오락 정보다. 신문의 닷컴 사이트부터 이런저런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미주알고주알 중계는 물론 해설까지 해준다. 드러내기도 당혹스러운 뒷담화도 거침없다. 화면 없이 글로 전하자니 오히려 더 적나라하기도 하다.
내놓고 발가벗고 달려드는 케이블의 기세에 겁을 먹은 지상파방송이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현상이라며 그들만의 문제로 끝낼 단계를 넘어섰다. 사회 전체가 이 모양이 돼버린 게 아닌가 싶다. 말초적 선정적 자극적 선동적 감정적 갈등적.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깝게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왔던 정치의 행태를 문제 삼을 수 있겠고, 넓게는 은근한 전통문화를 멸종시키는 문화의 척박함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선정-자극성 재활용 판매 안된다
신문에 따지고 싶다. 텔레비전이야 워낙 오락이 본질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의 가벼움을 참아내는 관용을 보여줄 수 있고, 나아가 안 보면 그만이다. 신문은 다르다. 먹고사는 일상을 헤쳐 가는 데 필요한 객관적 정보를 우선시하는 매체가 신문이다. 먹고 난 뒤 쉬고 노는 데 정신 쏟는 텔레비전과 다르다. 뒷마당 정도로 여기는 인터넷을 동원했지만 방송의 선정성과 자극성을 재활용 판매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차가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열에 들뜬 텔레비전의 정신없음을 식혀주어야 하는 신문이 ‘덩달이’처럼 같이 뛰면 사람들은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하는가.
신문의 또 다른 자극성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 한국에 30년 가까이 주재하는 일본특파원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한국 신문은 자극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제목은 물론 기사까지도 자극적이라는 점이 한국 신문에서 느끼는 제일감이란다. 주장적 저널리즘을 원인으로 꼽았다. 신참 평기자까지 제 이름 내걸고 칼럼을 쓰는 모습도 신기하지만 주장의 강도는 놀라울 정도라는 표정이었다. 사설에서조차 뭘 주장하려는지 애매할 정도로 완곡한 일본과 달리, 어디서든지 똑 부러지게 각을 세우려고 하는 모습이 한국의 신문이라는 얘기다. 화끈한 한국, 조심성 많은 일본의 성격이 언론에도 나타나는지는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다르게 느끼는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말끝에 내놓은 “주장이 많으니 사실 정보가 약하다”는 한마디는 뜨끔했다.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작금의 언론 정파성 문제가 팩트 부족에 있다는 언론학자의 논의와 맥이 닿는다 싶었다. 덧붙여 주장은 쉽고 사실 정보의 취재는 어렵다고 말했다. 전자는 선동이요, 후자는 성찰이다. 주장은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내몰아 가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냉정한 판단을 가로막는다. 선동은 즉각적, 단기적 효과를 창출하지만 성찰은 오랜 시간에 걸쳐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끄집어낸다. 주장이 많은 현상은 그만큼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뜯어 고쳐야 할 일이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 쉬운 선동보다 하기 어려운 성찰이 낫다.
팩트에 기초한 성찰을 제공해야
이쯤 되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갈등 양상이나 조변석개 민심의 한 원인을 짚어낼 수 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천방지축 하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주장에 매몰된 신문 모두가 책임의 일단을 감당해야 한다. 이념의 상업화라는 지탄에 별로 할 말이 없을 신문의 탓이 저질의 탈바가지를 기꺼이 뒤집어쓰는 텔레비전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수용자 인식조사에서 신문이 방송보다 사회적 영향력이나 신뢰도가 뒤처진다고 보고된 지 10년이 지났다. 막장의 텔레비전에 저널리즘의 주도권을 내주고 있다. 포기할 일은 아니다. 방송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여전히 사회적 영향력이나 언론으로서의 신뢰성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는 선진국의 신문을 보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제 할 탓이다. 숙의민주주의를 위해 선동이 아닌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 제 할 일이다. 사실 정보는 성찰을 위한 기반이다. 연예의 시대 주범인 텔레비전을 힐난하자면, 신문은 먼저 제 본질에 철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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