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이런 숫자가 나열된 스티커를 뒷범퍼에 붙인 차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 밑엔 ‘Bush's Last Day’(부시의 임기가 끝나는 날)라고 쓰여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임기(2009년 1월 20일)가 빨리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심정이 해학적으로 담겨 있다.
부시 대통령의 권위는 말이 아니다. 식당이나 사무실에서 그가 TV 화면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22일 오후 TV 카메라가 백악관을 15분간 생중계로 연결했을 때는 달랐다.
“마이클이 생후 18개월 된 아기였을 때 옆집 수영장에 빠졌습니다. 부모가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어느새 수영장 건너편까지 헤엄쳐 가 웃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이클은 호수를 왕복할 만큼 수영을 잘하는 소년으로 자라났고,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건강한 마음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언제나 약한 친구의 편에 섰고….”
마이클은 이날 최고 무공훈장(Medal of Honor)이 추서된 해군 특수부대(Navy SEAL) 대위의 이름이다. 마이클 머피 대위는 2005년 6월 28일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29세로 숨졌다.
부하 3명을 이끌고 수색작전을 하다 50여 명의 탈레반에게 포위된 그는 무전병 대신 무전기를 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평지로 뛰어 나갔다. 계곡의 엄폐물 속에선 무전이 연결되지 않는 데다 고립된 부하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등에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도 침착하게 구조를 요청한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쓰러졌다.
부시 대통령이 잔잔한 어조로 머피 대위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소개하는 동안 머피 대위의 부모는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그의 공적 사항이 낭독되는 동안 부시 대통령은 부모의 손을 꼭 잡았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흰색 드레스셔츠 속에 머피 대위의 군번 인식표를 걸고 있었다. 앞서 머피 대위의 부모가 선물한 것이다.
“마이클을 내 가슴 가장 가까운 곳에 둘 수 있어 정말 영예스럽습니다.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미국을 이라크전쟁의 수렁에 몰아넣은 지지율 역대 최저의 대통령. 하지만 순국 장병의 희생을 기리는 그 순간만은 유족의 고통을 함께하는 대통령으로 국민 모두에게 다가서는 듯했다.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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