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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9월 18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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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꽃 한 송이씩을 들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를 목메어 부른다. 박자도 틀리고 가사도 정확하지 않은데 벌써 몇몇은 훌쩍인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고 항일투쟁을 위해 조국을 떠났던 사람들,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던 사람과 그 후손이다.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내가 사할린에서 본 광경이다.
꽃 한송이 들고 사람들 틈에 끼어 애국가를 부르는 이 나그네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한(恨)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땅을 점령한 후 한인을 모집 또는 보국대 형식으로 이주시켰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 본토와 일본의 한인을 강제 징용해서 주로 탄광 노동에 종사시켰는데, 이런 사람이 7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2만여 명은 규슈(九州) 등 일본 본토로 다시 강제 징용됐고 나머지는 8·15광복을 전후해서 일본이나 러시아 사람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연사해서 현재 남은 강제징용 1세대는 사할린의 한인 3만6000여 명 중 3000명이 채 안 된다.
일본군은 2차대전에서 패하고 후퇴하면서 사할린에 살던 일본인 35만여 명을 대부분 철수시켰는데 소련군에 협력하여 일본인을 해칠 것이라는 이유로 한인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소련 역시 되찾은 사할린 남쪽 땅의 한인에게 일본 군국주의자 편에서 간첩행위 또는 반소련 해독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씌워 1953년까지 130여 명을 숙청했다고 한다.
광복 전의 희생은 나라를 잃은 죄 때문이라고 하자. 광복 후의 희생은 무슨 죄 때문인가. 광복 후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는 공산정권이 들어섰건만 그들은 소련 지배 하의 사할린 동포를 보호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한반도의 공산화와 남침에만 몰두하였으니, 그러고도 민족주체, 인민해방 운운할 수 있는지 분노가 치민다.
대한민국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위령탑을 세우고 사할린동포 보호에 관심을 가졌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외세를 등에 업은 민족분열의 산물이라고 비난하면서 입만 떼면 민족이니 자주니 부르짖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믿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다.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꽃 한 송이를 들고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 강제 징용된 오빠를 찾아 1942년 18세 어린 처녀의 몸으로 사할린에 왔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오빠는 다시 일본으로 징용되어 갔고 자신은 고향땅에 돌아갈 수 없어 현지에서 결혼해 6남매를 두었다. 남편이 죽고 혼자 몸으로 자녀를 모두 대학교육까지 받게 하였단다. 할머니의 인생역정에서 우리 민족의 강인함과 정열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해진다.
해외 희생 동포 위령탑은 사할린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팔라우, 마셜군도, 티니안, 사이판 등에도 있다. 독립군을 뒷바라지하다가 희생당한,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 강제 징집 또는 징용돼 말 못할 고초를 겪다가 죽어 간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해외 희생 동포 추념 사업회가 주관해 뜻있는 사람들이 세웠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 물밀듯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여! 한번쯤 사할린에 들러 위령탑 앞에 꽃 한 송이 놓고 무명의 원혼에게 술 한 잔이라도 올리는 것이 어떤가.
강신욱 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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