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학계와 언론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얘기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혁명, 노동, 경제결정론과 같은 단어가 인기를 끌었지, 문화나 매력과 같은 단어는 무시됐다.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하부구조’를 중시한 마르크시즘의 영향력이 대학가에 크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막스 베버와 요한 하위징아 같은 사상가도 있었다.
새뮤얼 헌팅턴과 로런스 해리슨 같은 학자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책을 통해 “문화적 가치가 인류 발전을 결정한다”고 결론짓는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요즘은 문화담론의 전성기가 구가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데 결정적 논거를 제시한 이는 하버드대의 조지프 나이 교수였다. 그는 ‘제국의 패러독스’, ‘소프트 파워’ 같은 저작에서 소프트 파워의 개념을 정립했다. 나이는 군사력, 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하드 파워(강성권력)와 스스로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문화와 이념, 정책에서 나오는 힘인 소프트 파워(연성권력)를 구분하고 둘을 조화롭게 육성해 ‘똑똑한 권력(smart power)’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와 같은 소프트 파워를 키워야 다른 국가가 선망하는 ‘매력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부쩍 많이 나타나고 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한 일면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많이 인용되는 것이 현대차의 수출량과 영화 ‘쥐라기 공원’의 매출액이다. 1992년 당시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스티븐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 매출액은 무려 8억5000만 달러였다. 현대차 150만 대 수출액과 맞먹는 금액인데, 당시 현대차의 실제 수출량은 그 절반도 안 되는 64만 대였다. 힘든 제조공정을 거쳐 차를 만들어 많이 팔아도 영화 한 편이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한참 못 미쳤다는 것은 문화상품의 가치를 깨닫게 한 계기였다.
다른 좋은 예는 1970년에 해체되고 이미 멤버 중 두 사람이 고인이 된 록 그룹 비틀스가 매년 벌어들이는 저작권료가 지금도 1억 달러를 상회한다는 사실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이긴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록 밴드가 창출해 내는 재화는 소프트 파워의 위력을 새삼 인식시켜 준다.
한국이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데 유념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인종과 역사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간혹 나타나는 폐쇄성의 문제, ‘문사철(文史哲)’과 같은 순수학문에 대한 경시는 진정한 매력국가가 되는 데 장애요인이 될 것이다. 정부나 국민이나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 강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소프트 파워를 창출하는 중요 베이스인 기초학문의 중요성은 철저히 간과되고 있다.
‘쥐라기 공원’은 공룡에 대한 지식을 축적한 고생물학 및 지질학이라는 기본 위에 훌륭한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문화적 상상력은 흔히 고전에서 나온다. 미국과 뉴질랜드에 막대한 부가가치를 안겨 준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J R R 톨킨이라는 (이른바 돈 안 되는 전공인) 중세문학 전문가가 고대와 중세에 대한 깊은 지식을 기반으로 창작한 위대한 오리지널 소설 덕을 톡톡히 봤다. 자랑스러운 한류문화상품인 ‘대장금’도 이영애라는 명배우가 있기 전에 문사철에 능한 이영현이라는 빼어난 작가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예비고사 및 학력고사의 전국 수석을 살펴보면 그들이 택한 전공은 매우 다양해 경제학 물리학 역사학 불어불문학 전자공학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돈이 되고 안정적인 실용학문만을 맹종하는 풍조가 굳건히 자리 잡으면서 문과건 이과건 문화의 진정한 토양인 기초학문이 무너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소프트 파워를 가진 진정한 매력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풍토부터 시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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