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정치 한다는 사람 믿지 말라”

  • 입력 2006년 5월 8일 03시 01분


우리나라 대기업치고 검찰의 수사를 받아 보지 않은 곳이 있을까. 기업 규모 면에서 상위에 있는 기업 가운데 수사를 받지 않은 곳은 손꼽을 정도이다. 검찰이 수사 중인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SK, 삼성, 두산 등을 보면 이런 와중에 기업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조차 들 때가 있다.

과거 기업인들이 수사를 받았을 때는 거의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경제 위기나 기업의 경영 위기가 닥치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져 경제부처 공무원이나 오너, 전문경영인을 막론하고 기업인들이 수사 대상이 됐다. 죄목은 공무원들에게는 직무유기, 경영인들에게는 횡령 배임 혐의가 적용되는 게 보통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경제 위기의 극복’을 대신해 ‘양극화 해소’가 과제로 내걸려 분위기는 다르지만 혐의 내용을 보면 배임 횡령 탈세 등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 중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배임 혐의다. 공무원의 직무유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직무유기와 배임에 대한 판결은 다르다.

1999년 환란 재판 때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공무원들은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들이 외환 사정의 심각성을 의식적으로 축소 또는 은폐 보고했다는 증거나 고의성은 찾을 수 없다…피고인들에게 조속히 ‘IMF’행을 결정하지 못한 점을 탓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무 범위 내에서 환란 대책을 마련한 만큼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

감사원이 수사 의뢰하고 검찰이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환란의 주범’으로 징역형을 구형했다.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직무유기가 ‘죄목’이었다. 그러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정책 판단에 대해서까지 ‘나중에 결국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이유로 사법적인 처벌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이 재판에서 확인됐다.

그 후 환란의 책임은 ‘방만한’ 경영을 한 기업인들에게 돌려졌다. 많은 기업인이 경영에 책임을 지고 구속됐고 그들이 경영하던 기업들은 공매 절차를 거쳐 새 주인에게로 갔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기업의 과다한 부채가 환란의 원인이었다고 보고 부채비율을 낮추라는 ‘강압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기업들은 사재를 동원해 빚을 갚거나 무리한 증자를 통해서라도 수치상의 부채 비율을 낮춰야 했다. 요즘 수사를 받고 있는 현대차와 참여연대가 고발한 신세계의 경우 이때 정부의 방침에 따라 증자를 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정몽구 회장은 증자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계열사들에 증자하도록 했다가 약 3000억 원의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반면, 신세계는 대주주가 계열사 증자에 참여해 이익을 독식했다는 이유로 고발된 것이다.

기업인들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정부의 지시를 따르자니 나중에 불법 행위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거부했다가는 당장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인들은 배임 혐의에 대한 판결에 민감하다. 경영인의 배임에 지나치게 관대할 경우에는 주주의 권익이 침해될 것이고, 반대로 엄격할 때에는 경영인의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

과거 1960년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불렸던 ‘한비사건’ 때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던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정치 한다는 사람 믿지 말라”고 했다. 정부가 사전에 내락한 대로 투자했지만 나중에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억울함을 한마디로 말한 듯하다. 요즘 기업인들이 새겨 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정부 당국자의 말을 곧이 믿을 수 없을진대 하물며 정치권 로비스트의 말을 어찌 믿고 비자금을 만들고 주고받을 수 있을까.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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