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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5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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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해서도 그렇다. 로봇의 지능과 인간 지능의 진화 속도를 비교하면서 몇 십 년 후면 로봇이 인간을 부리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미래 예측들이 무책임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나온 담론들은 또 다른 담론으로 어느새 확대되어 우리들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게 했다.
▼영감과 창의력의 샘▼
그러나 미래 예측의 역사야말로 부정에 부정이 거듭되어온 역사라는 사실을 누구도 잘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론 체계에 맞다 싶으면 끌어다가 무책임하게 당장 내일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야단을 떨고 어제까지의 진리는 폐기처분되어 마땅한 것처럼 과장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혼돈에 대해 중심을 갖고 싶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대해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주장만을 수용하고 싶다. 이런 때 ‘아이를 목욕시키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는 말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바다의 표면을 보면 물결이 심하게 일렁이는 날도 있고 미동도 없이 잔잔한 날도 있다. 그러나 물의 표면만 보고, 즉 물결의 일렁임만 보고 바다의 전모를 말할 수는 없다. 바다의 저 깊은 곳, 원류를 보지 않는 담론들은 이제 담론자 스스로 폐기해야 한다.
어지럼증만 일으키는 요즘 시절은 참으로 속절도 없다. 어느새 우리는 한 해를 한 달도 채 못 남기고 있다. 이럴 때 이 어지럼증을 어떻게 가라앉힐까.
문득 나는 느림의 사유를 가꾸는 방법으로 책읽기를 제안하고 싶다. 책은 우리들이 흔히 느끼는 현기증을 상당 부분 가라앉힐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일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열풍처럼 전자책 바람이 불어왔을 때 종이책은 곧 표준 모형의 전자책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전자책이 주는 이점이 아직 훼손되지 않고 여전한데도 오히려 종이책의 효용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과연 미래 예측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된다.
전자책 열풍 당시 종이책의 문제는 바로 그 느림과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의 적음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가령 전자책은 정보량은 말할 것도 없고 검색 기능 등 우수한 기능이 훨씬 더 많은 매체인 것처럼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손의 기능이 따르지 않는, 즉 약간이라도 노동이 따르지 않는 정보 습득이란 것은 그만큼 잘 갈무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당시에는 간과하고 있었다.
책은 우리들에게 비단 현안의 해답만이 아닌, 포괄적인 문제에 대해 영감과 창의력도 준다.
우리는 책을 읽다가 잠 속으로 빠질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별스러운 다른 사유들도 가꿔갈 수 있다. 반면 영상매체들은 우리의 오감 중 가장 강력한 시청각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아가 원천적으로 다른 사유가 개입되는 것을 봉쇄한다.
▼느림의 사유를 찾아서▼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만 해도 그렇다. 영화로, 캐릭터 산업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사실 그 핵에는 조앤 롤링이라는 영국 작가의 종이책 ‘해리 포터’가 있는 것이다. 대략 현재 4권까지 나온 이 책이 7권까지 모두 나올 경우 10억 달러에 이르는 수입이 예상된다고 한다. 이 소설의 상업적 성공은 연약해 보이는 한 작가의 머릿속에서 발아된 것이었다. 또한 그녀의 작가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것은 바로 종이책이었다.
책을 읽는 삶은 결코 속도가 처지는 삶도 아니고, 또한 느림 역시 결코 처지는 삶의 방식도 아니다. 속도전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사실은 내면적으로 느림의 사유를 가꿔나가야 할 때이다. 결국 모든 것이 인간이 문제이고, 속이 울렁일 정도의 어지럼증 속에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 중의 하나로 조용한 책읽기를 권하고 싶은 것이다.
정은숙(시인·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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