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나와 동아일보]'든든한 삶의 동반자'

  • 입력 2000년 3월 23일 20시 22분


《창간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었다. 동아일보는 그들과 더불어 80년 격동의 세월을 함께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거쳐 근대화와 민주화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는 그들과 함께 역사를 지켰고 만들어냈다. 그들이 오늘에 되새겨보는 동아일보와의 인연담 속엔 우리 근 현대사의 숨결이 그대로 배어 있다.》

▼내 인생의 도약대/기사 게재후 큰 반향▼

출가 전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해 온 법정스님(67)은 50년 독자이다.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6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서 생활하고 있을 무렵 중앙일간지로는 처음으로 문화면에 칼럼을 기고하면서부터. 75년 동아일보 광고사태 때는 신동아에 글을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로 격려광고를 내기도 했다.

법정은 80년대 잠시 인연의 끈이 끊겼으나 90년대 들어 다시 활발한 기고를 시작했고 특히 93년 봄부터 매달 한차례씩 6년에 걸쳐 ‘산에는 꽃이 피네’를 연재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는 당시 세상과 스님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채널이기도 했다. 스님은 “잔재주 부리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언론의 정도를 걸어온 동아일보의 전통적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넘은 시대의 거목(巨木) 정주영(鄭周永·85)현대명예회장. 그는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집안 농사일을 도우면서부터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맺었다. 정명예회장은 “당시 구장댁에 유일하게 배달돼오던 동아일보를 동네어른들이 한바퀴 다 돌려본 뒤 맨 꼬래비로 빼놓지 않고 얻어보았다”며 “동아일보를 보는 것이 바깥 세상과 단절된 농촌에서 갖는 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고 말한다.

가슴아프면서도 더욱 깊었던 그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던 동생 신영(信永)씨와의 관계. 대학원에 재학중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국회출입기자로 일하면서 기자들의 연구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했던 신영씨는 독일 유학중 유명을 달리했다. 유학중에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일했던 신영씨를 특히 아꼈던 정명예회장은 아우의 못다한 뜻을 이어달라는 의미에서 언론인들의 연구, 저술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을 출연해 ‘신영연구기금’을 만들었다.

‘칼럼니스트’ 유시민(柳時敏·41)씨는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돼 있던 85년 6월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었다. 동아일보 ‘창(窓)’ 기사로 보도된 그의 ‘항소이유서’는 암울했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씨는 “그 인연 덕분에 그해 말 출옥한 뒤 운동 진영 등에서 성명서 쓰는 일을 주로 하다보니 오늘날 칼럼니스트라는 이름까지 얻게 됐다”고 말한다. 유씨는 고교시절인 75년 동아광고사태 때는 격려광고 읽는 재미로 살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초등학교 이래 수십년 독자인 심재륜(沈在淪·56)전대구고검장은 ‘김태촌파’ 수사 당시 동아일보 법조팀이 김태촌의 운전사 비망록을 특종 보도한 것이 결과적으로 고위경찰간부 등 비호세력을 척결하는 계기가 됐고, 이로 인해 본인도 유명세를 얻었다.

정양모(鄭良謨·67)전국립중앙박물관장은 62년 초임 직원 시절 서울 수유동 근처 오봉산에서 우연히 조선시대 초기 도자기 가마터를 발견한 것이 동아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된 이후 ‘도자기 등 문화재 전문가’로 통하게 됐다.

94년 11월 동아일보에 보도된 ‘생체 간이식수술 성공’의 주인공인 이승규(李承奎·51)서울중앙병원외과교수는 “생체 간이식에 대한 일반인의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그 기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안영경(安英景·46)핸디소프트사장은 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의 개발 주역으로 동아일보에 처음 보도된 이후 창업에 성공한 케이스다.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민주화의 기수/반독재 시절 민주화밝힌 시대의 등대▼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씨는 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상만(金相万)동아일보명예회장의 초청으로 최초의 ‘정치회동’을 가졌을 만큼 동아일보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 이후 ‘3김’은 관용어가 돼버렸고, 지금까지 그들의 시대를 이어오고 있다.

71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김대중대통령은 ‘반독재 민주화’를 지향해 온 ‘야당지’ 동아일보와 본격적인 인연을 쌓았다. 김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미국망명길에 오르기에 앞서 82년 12월18일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됐을 때 이 사실도 동아일보 특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야당 내부에서 보면 60년대와 70년대 동안 정작 동아일보와 가까웠던 사람은 민주당 구파 출신인 김영삼전대통령이라는 것이 동교동측의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4·19 후 구성된 5대국회에서 YS는 ‘깨끗한 정치’를 지향하는 청조회(淸潮會)의 멤버였는데, 그 실천의 일환으로 손수 구두를 닦는 YS의 사진이 동아일보에 보도된 일이 있다.

YS는 부친 김홍조(金洪祚)옹과 고 김상만동아일보명예회장이 동갑인 관계로 김명예회장을 아버지처럼 대했다는 것이 동아일보 기자로 야당출입을 오래한 강인섭(姜仁燮)전의원의 설명.

자민련 김종필명예총재는 “초등학교 다닐 때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한 장면의 사진이 일장기가 지워진 채 게재된 동아일보를 보고 형들이 만세를 부르며 나가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라 평소같으면 신문배달이 안될텐데 집배원이 그 비를 무릅쓰고 신문을 가져왔다”고 동아일보에 대한 첫 인상을 회고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서울 수복 직후 혼란기인 경기중 4학년때 한동안 생활이 어려워 동아일보를 배달했는데, 당시 동아일보의 권위있는 제호가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며 “나로서는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신문”이라고 말한다. 이총재는 국무총리 재직시 김상만명예회장이 서거하자 국무회의를 소집해 훈장을 추서했던 기억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동아광고 사태/언론탄압 저항 전국민 격려광고 쇄도▼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준표(洪準杓·47)변호사는 동아일보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난다. “74년 광고사태 당시 고려대 법대 3학년이던 나와 이승재(李承栽)현서울시경형사부장, 오용석(吳勇錫) 박세규(朴世奎)변호사 등 4명의 동기생이 그때 돈으로 18만원의 성금을 모아 동아일보에 기탁한 것이 12월29일 사회면 기사로 보도되면서 격려광고의 물꼬를 텄다”는 것.

홍변호사는 검사시절인 88년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친인척이 관련된 노량진수산시장비리사건 때는 동아일보 법조팀의 협력을 얻어 검찰 수뇌부의 수사중지 압력을 뿌리치고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2학년 동기생이던 염진섭(廉眞燮·46)야후코리아사장,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 & 리서치’의 노규형(盧圭亨)사장도 당시 격려 광고를 냈었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문화주의 등불/스타들의 등용문▼

소설가 이문열(李文烈·52)씨는 소설 ‘새하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79년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1회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며 “지방신문에 근무하던 이듬해(80년)에는 동아일보로부터 기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고용조건을 협의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굳은 인연을 자랑한다.

이씨는 “유달리 고전만을 강조하던 다른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와는 달리 동아일보는 실험적인 정신의 소설도 받아들였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데뷔하기 전이나 후나 이사를 다니더라도 한번도 동아일보와 떨어져본 적이 없다”는 박완서(朴婉緖·69)씨는 70년 여성동아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박씨는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면서 드나들었던 동아일보 구(舊)사옥이 친정집같이 푸근하게 느껴지던 시절을 지금도 그리워한다”며 “요즘에는 동아일보 토요일자 ‘책의 향기’를 샅샅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주목받은 은희경(殷熙耕·41)씨도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이중주’가 당선되면서 데뷔했다. 은씨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지 얼마되지 않은 나에게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등 연재기회를 준 덕분에 대중과 가까워졌다”며 “98년에는 동아일보 수습기자의 교육과정에 인터뷰 대상자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인연을 갖고 있다”고 소개. 영화 ‘초록 물고기’의 감독인 이창동(李滄東·46)씨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이다. 83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그의 소설 ‘전리품’이 당선됐다.

한국 바둑계를 울린 중국 여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의 ‘반상의 성(性) 혁명’도 동아일보 주최의 43기 국수전에서 이뤄졌다. 조훈현(趙薰鉉) 9단을 꺾고 국수가 된 그는 세계 최강인 이창호 9단에게 2연패의 치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손기정(孫基禎·88)옹.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암울한 시기 한국인의 희망이었던 그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설명된다. 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던 손옹은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을 귀국하던 길에 전해듣고 뛰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손옹의 마라톤 우승과 일장기를 말소했던 동아일보의 보도는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식을 북돋우는 계기가 됐다.

손옹이 금메달을 딴 지 56년째 되던 해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黃永祚·30)씨는 동아마라톤 출신. 황씨는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으로 도전했던 동아마라톤대회(91년 3월)에서 2시간12분대를 기록함으로써 ‘몬주익의 영광’을 예고했었다. ‘아시아의 물개’로 명성을 떨친 조오련(趙五連·49)씨는 동아수영대회 출신. 제6회(70년)와 7회(74년) 대회에서 잇따라 자유형 1위를 차지한 조씨는 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 두 종목에서 우승했다. 한국신기록을 50여차례 경신하고 대한해협과 영국 도버해협 횡단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그는 동아일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조씨는 “대한해협 횡단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돈키호테’같다고 말했지만 동아일보는 흔쾌히 창간 60주년사업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축구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車範根·47)씨도 동아일보를 잊지 못한다. 그의 독일 프로축구 진출에서 은퇴까지를 가장 많은 애정으로 보도한 신문이 동아일보였다.모델로도 활동하는 신세대 축구스타 안정환(安貞桓·24)선수는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부활시킨 한일 대학축구대회에서 각광을 받음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윤승모·김영식기자>ysmo@donga.com

▼언제나 곁에 함께/애독자…지국장…배달사원…한평생 인연▼

이강훈(李康勳·97)전광복회 회장은 19세 때 막 창간된 동아일보의 지국장을 잠시 맡았다가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의 길에 올랐다.

김병수(金炳洙·64)연세대총장은 연세대 의대 시절 별명이 ‘동아일보’였다. 김총장은 부친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동아일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습관을 갖게 됐고, 그것이 대학에까지 이어져 학업중에도 틈만 나면 동아일보를 들추기 일쑤여서 붙여진 별명이다.

하권익(河權益·60)삼성서울병원장은 6·25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초등학교 시절 “동아일보요, 신문이오”를 외치며 거리를 달렸던 배달소년의 추억을 갖고 있다.

성우 배한성(裵漢星·55)씨도 6·25때 행방불명된 부친을 대신해 중학시절부터 동아일보 배달소년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중학시절 배달소년으로 일했던 김대성(金大星·38)현주컴퓨터사장은 “젊은층을 겨냥한 기사를 늘리면 좋겠다”고 주문한다.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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