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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3월 8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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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속히 불어오는 디지털 혁명이 젠더(성) 혁명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정보의 대양(大洋)은 섬세함과 속도, 창의의 경쟁이다.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세밀하게 관리하면서 누가 정보를 빨리 획득하고 이를 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디지털 경쟁에서는 여성적인 감성과 유연함, 상상력과 같은 소프트한 가치가 돋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 100여년은 여성이 남성, 가정, 사회로부터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한 외로운 시간이었다. 정치적 기본권의 쟁취로부터 고용의 평등권 확보, 가정 직장 사회에서 갖가지 성적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철폐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한 눈물겨운 투쟁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여성의 지위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기간 남존여비의 인습에 길든 한국 사회가 해방후 불과 반세기 만에 남녀평등 사회로 빠르게 이행되는 모습은 실로 경이롭다. 경찰대학과 사관학교의 문호가 여성에게도 활짝 개방돼 수석입학은 물론 최초의 생도대장이 탄생했다. 올해 사법연수원 입교식에 100여명이 넘는 여성 예비법조인들이 남자연수생들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우리 사회에 이제 ‘금녀의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개발계획위원회(UNDP)가 매년 발표하는 남녀평등지수는 1999년 현재 세계 30위, 여성권한 척도는 78위에 머물고 있다. 유교문화권의 다른 아시아국가들보다도 여성의 지위와 사회참여율이 현저히 낮다. 두드러진 분야가 정치다. 국회의원 정원 299명 중 여성의원 수는 11명으로 3.1%에 불과하다. 지방의회로 가면 사정은 더해 지방의회 총 의원 4180명 중 여성의원은 97명으로 국회보다 더 낮은 2.3%에 불과하다. 이번 정당법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 의원 30% 이상을 반드시 여성으로 공천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날로 심화되는 성비 불균형 문제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예고한다. 1998년말 현재 여아 100명당 남아 110명을 초과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2010년경에는 결혼적령 인구의 성비불균형이 100대 123 수준에까지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남녀평등 사회를 향한 도도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남아선호 사상이 국민정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성폭력, 성희롱, 가정폭력, 고용기회의 차별 등도 아직 근절되지 않았다. 21세기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해 우리 사회에 잔존한 성차별적인 제도, 관행, 가치관 등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건강한 가정의 유지와 국가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세기에 여성문제는 여성들만의 것이었고 사회는 시혜적 차원의 관심만 보였을 뿐이다. 새 천년은 지식정보화와 함께 여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고 지역과 국가의 과제이며 인류가 풀어나가야 할 공동의 숙제다. 디지털 갭에 못지않게 ‘젠더 갭’이 지역과 국가간 경쟁력의 격차를 만들게 될 것이다. 가정의 울타리를 걷어내는 일에서부터 여성의 잠자는 능력의 개발을 북돋우고 사회 각 분야의 참여를 늘리는 데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정보마인드 못지않게 ‘젠더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작은 관심에서 큰 정책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시각을 담아야 한다.
이의근(경상북도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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