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 새지평]박혜란/떡값과 촌지

  • 입력 1997년 2월 25일 20시 13분


참 이상하다. 미국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은 절대로 촌지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한국 교포들이 몰려 있는 지역만은 다르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족(漢族)과 조선족들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사는 중국의 변방도시에서도 유독 조선족 학부모들만 공교육비보다 훨씬 부담스런 촌지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고 한다. ▼ 선천성 촌지 중독증 ▼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최근 두 지역에서 내가 만난 학부모들이 모두 문제의 근원을 제도나 교사가 아니라 같은 민족 학부모에게 돌린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뇌물은 안된다며 완강하게 거절하던 교사들도 뇌물이 아니고 선물이라며 끈질기게 매달리는 학부모들 때문에한 학기만 지나면 촌지 중독증에 걸리고만다고 한다. 주는 것에 중독된 학부모들이 받는 것에 중독된 교사를 만들어낸 셈이다. 일단 촌지가 관행으로 굳어버리게 되니 자발성은 사라지고 강제성만 남더라며 동포 학부모들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언젠가 들었던, 북한의 학교에서도 역시 촌지가 왔다갔다 한다는 여성 귀순자의 증언을 떠올리면서 촌지에 관한 한 우리 민족은 지역이나 체제가 달라도 동질성을 잃지 않고 있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우리 민족의 핏줄에는 선천성 촌지 중독증을 일으키는 병균 같은 것이 흐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추론도 해보았다. 학교 촌지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부각되는 문제이면서도 실제로는 그 누구도 쉽게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지도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극히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사례를 갖고 침소봉대해서 전체교사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든지, 예로부터의 미풍양속의 연장으로 해석해야 한다든지 하는 옹호론이 생각보다 쉽게 먹혀드는 탓도 있으려니와 학교 바깥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 사건의 액수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돈을 갖고 뭘 그리 난리냐는 일종의 불감증이 만연된 탓이 아닐까 싶다. 아닌게 아니라 1만원짜리 지폐로 가득찬 억대의 사과상자가 왔다갔다 하는데도 뇌물이 아니라 떡값이라고 우겨대면 죄가 없다는 판에 그깟 얄팍한 봉투를 갖고 부정이니 비리니 목청을 높인다는 게 무언가 형평에 어긋나는 것도 같고 또 너무 빡빡하게 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억대의 떡값이나 몇 만원대의 촌지나 모두 특혜를 얻기 위한 불공정거래라는 점에서 성격은 똑같다. 그것이 더 큰 돈이든 더 큰 관심이든 결국 남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는 행위다. 얼마 전 두 전직 대통령에게 떡값을 바친 기업인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은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방어용으로 거금을 냈다고 변명했는데 이것 역시 대부분 학부모들이 「촌지문화」에 동참하는 이유와 닮은 꼴이다. ▼ 특혜위한 불공정거래 ▼ 입학철이 되니 올해도 어김없이 초보 학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촌지문제가 떠오른다. 불의에 저항했던 세대가 학부모가 되었음에도 촌지가 정치인의 떡값처럼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지레 풀죽은 모습을 보이다니 참 이상하다. 그러나 떡값과 촌지는 같으면서도 또 뚜렷하게 다르다. 떡값은 처음부터 받는 자의 부패를 전제하지만 촌지는 어디까지나 주는 자의 선의로 출발한 것이다. 잘못된 제도가 떡값을 번성하게 만들었다면 촌지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변질되었다. 변질된 촌지는 이미 선의가 아니므로 마땅히 근절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사도 떳떳하다. 촌지 중독증은 선천성도 아니고 불치도 아니다. 초보 학부모들 파이팅!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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