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前총리 “日 70년 걸어온 평화의 길 역행… 아베의 우경화 더 심해지고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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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日침략 사죄 담화’ 무라야마 前총리, 아베에 직격탄

21개월 만에 다시 만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올해 아흔한 살인 그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표정에선 경색된 한일관계나 아베 내각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한 걱정이 컸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21개월 만에 다시 만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올해 아흔한 살인 그는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표정에선 경색된 한일관계나 아베 내각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한 걱정이 컸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 1995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주인공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 그를 21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흔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목소리였지만 일본의 앞날을 걱정하는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

2013년 8월 인터뷰 이후 21개월 만이었다. 16일 도쿄에서 다시 만난 아흔한 살 노(老)정객은 시종일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힘을 주어 설명할 때는 연설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꼬이고 있는 한일 관계나 과거사 문제에서 독자 행보를 걷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일본의 ‘살아 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앉자마자 “일본의 우경화가 더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내심 놀랐다.

21개월 전만 해도 ‘우경화’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에 신중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틀 전(14일) 아베 내각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년 만에 자위대를 사실상의 군대로 격상하는 안보법률 제정·개정안을 각의(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것에 ‘설마’ 하던 일본의 재무장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의 걱정도 한층 깊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아베 총리를 향해 “전후 70년간 일본이 걸어온 평화의 길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기자가 그에게 “총리가 된 직후인 1994년 7월 국회 연설에서 ‘자위대는 합헌’이라고 발언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었나”라고 묻자 그는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또 자위대가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베 내각은 이런 기본 전제를 흔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베 총리가 이번 방미 중 의회 연설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일본 내 각종 미디어 인터뷰를 통해 “속임수”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하자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아베 총리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계승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답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날 1995년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배경도 다시 언급했다. “모처럼 일본이 세계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발표한 것인데 아베 총리는 침략 지배 반성 사죄와 같은 말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다시 세계인들의 불신을 살 수밖에 없고 이는 일본인들에게 좋을 것이 없다.”

그에게 “아베 총리를 직접 만나 설득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2013년 2월 딱 한 번 만나고 이후로는 못 만났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시 내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아베 총리로부터 국회에 나와 방중(訪中) 결과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총리 휴식 시간에 잠시 개인적으로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2015년 발표할 아베 담화와 관련해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면서 전후 70년에 걸맞은 새로운 방향을 표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후로는 연락이 없다.”

그를 만난 곳은 도쿄(東京) 간다(神田) 메이지대 정문 앞 길 건너편 교우회관이었다. 메이지대는 그의 모교이기도 하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의 모교이기도 하다.

노정객은 청춘들로 북적이는 창밖 거리를 보며 옛일이 떠오르는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정치경제학과 2학년이던 1944년 학도병에 차출돼 미야자키(宮崎) 현 육군 보병 제23연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이듬해 군에서 패전을 맞았다. 전쟁은 인간의 머리를 미치게 한다. 나는 비록 전쟁터에는 안 갔지만 본토에서 느끼는 비참함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폭격으로 곳곳이 불바다가 됐다. 국민 전체가 (전쟁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만든 게 전쟁과 무력 사용을 금지한 평화헌법이었다.”

화제를 한일 관계로 옮겼다. 그는 “내가 속한 사회당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협정 반대를 주도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양국 모두에 플러스가 됐다”며 “한일 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위안부 문제도 한일 양국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시켜 민간 모금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위안부 문제는 어쨌든 일본이 일으킨 일이다. 그러니 일본이 해결책을 내놓고 한국도 귀를 기울여줘야 한다.”

세습 정치가 지배하는 일본 정계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총리까지 오른 비결을 묻자 “내 인생은 ‘메구리아와세 인생(めぐり合わせの人生)”이라고 했다. 운명에 등 떠밀려 왔다는 의미이다. 그는 “남은 인생, 일본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나의 운명인 것 같다”고 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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