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고리 왜 안끊기나?]뿌리깊은 「조직비리」

  • 입력 1999년 6월 16일 19시 07분


《부정부패는 왜 그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조직 부패’를 꼽는다.

‘상납’(上納)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직 부패란 조직원이 함께 부패행위를 저지르거나 부패행위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문제가 생기면 보호해주는 관행이 구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개인 부패는 문제가 있는 사람만을 처벌하면 된다.

그러나 조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부패는 사람을 솎아내도 조직 자체는 건재하기 때문에 지속된다. 조직 부패는 또 내부인이 직간접적으로 공범자가 되기 때문에 외부에서 적발하기도 힘들다. 내부 고발을 꺼리는 동양적 풍토도 조직 부패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에서 조직 부패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그 폐해는 무엇이며 근절책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조직 부패의 특징모든 조직의 업무처리는 단계가 있어 한 개인의 부패행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조직 내부의 공모나 묵인 없이는 조직 부패가 성립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분배와 상납’의 고리가 자리잡게 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무 공무원의 비리를 조사할 때면 매번 반복되는 모습이 있었다.

일선 세무서의 한 공무원이 검찰에 불려가면 같은 과 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내거나 잠적해 버린다. 일단 ‘튀고 보자’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얼마나 구린 게 많으면 그렇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세무 공무원을 하다 은퇴한 김모씨(59)는 “그같은 비난은 내부 사정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세무 공무원들이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숨어버리는 것은 뒤가 구린 탓도 있지만 상급자들에게 빨리 사태를 수습하라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하다. 평소 부하들로부터 상납받은 데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김씨 역시 이런 일로 몸울 피해보기도 했고 몇년 뒤 일선 세무서 과장일 때는 부하직원이 검찰에 비리가 적발돼 조사를 받자 사태 수습을 위해 뛰어다닌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과거 세무 공무원 사이에 뇌물 분배를 둘러싸고 이른바 ‘전목일구(田目日口)’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유행한 것도 ‘보험금 성격의 상납 관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담당직원과 계장 과장 국장이 나눠 먹은 것은 ‘전(田)’이며 담당 혼자 챙긴 것은 ‘구(口)’에 해당한다.

지난해 뇌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동료 경찰끼리 칼부림을 하는 바람에 드러난 고속도로 순찰대의 비리사건도 경찰 내부의 분배 및 상납 관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

당시 전직 순찰대 간부는 “교통법규 위반자로부터 받은 뇌물을 동료 순찰대원끼리 분배하고 순찰대 본대 반장에게 매달 20만∼30만원, 지방청 교통계와 감찰에게 격월로 20만원씩, 내근자에게 매달 30만원씩 상납해왔다”고 폭로했다.

조직 부패의 또 다른 특징은 ‘공범만들기’. 조직원간에는 서로 하는 일을 훤히 알기 때문에 부패문화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조직 부패가 성립하기 힘들다. 이때문에 새로운 상관이 부임한 뒤 종전의 관행에 제동을 걸 경우 ‘길들이기’에 나서거나 ‘왕따’를 만들어 버린다.

93년 서울시내 일선경찰서 교통계장으로 발령받은 경찰대 출신의 L씨는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매달 부하직원들이 돈을 거둬 고참 직원을 통해 돈을 가져와 이를 거절하자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것.

L씨는 이런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교통사고 조사 기록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문제가 있는 직원들은 심하게 질책을 했다. 이후 경찰서 내부에서는 L씨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업무 능력이 없다” “출세에 눈이 멀었다” “더 큰 것을 바라는 것 아니냐”는 등.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직속상사인 교통과장은 ‘나 몰라라’ 하는 자세로 일관했고 서장 역시 아랫직원들과 융합하지 못하는 L씨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견디다 못한 L씨는 결국 부하직원들로부터 돈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 그에 대한 음해성 소문이 사라졌다.

현재 경감으로 재직 중인 L씨는 “당시 부하직원들이 나를 길들이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조직 부패의 폐해일단 관행화된 조직 부패는 조직원들을 부패불감증에 걸리게 만든다. 한걸음 더 나가 그들은 자신들의 부패행위를 합리화하게 된다. 또 ‘다들 그러는데 나만 별종 노릇을 할 필요가 있냐’는 인식을 갖게 된다.

2월 식품의약청의 모 국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식품의약청장이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 바로 그날 제약업계 업자로부터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의 장이 구속되는 순간에 태연하게 뇌물을 받고 이 돈을 사무실 캐비닛에 넣어 둘 정도로 부패불감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조직부패가 관행화되면 부패가 조직 내부에서는 행동 규칙이 되고 개인은 이같은 조직 풍토에 저항하기가 힘들어진다.

오히려 이런 문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 출세를 하고 저항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직은 본래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상태가 된다.

최근 검찰이 ‘고급옷 로비 의혹사건’을 수사하면서 법무부장관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보였던 갖가지 행태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전대 법과대 김용세(金容世)교수는 그런 점에서 검찰의 정치적 예속도 넓은 의미의 조직 부패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위직 검찰간부들이 정치적인 잣대로 수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일선 평검사들 사이에도 이같은 문화가 퍼지게 되고 결국 원칙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

상부의 말을 잘 듣는 검사가 인사에서 이득을 보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검사는 조직에서 소외되기 쉽다. 이런 관행이 구조화되면 조직의 기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교수의 설명이다.조직부패어떻게근절할것인가우선 조직내부에 엄격한 감찰조직이 필요하다.

한국행정연구원 박중훈(朴重勳)정책연구부장은 “현대의 관료제는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검찰이나 감사원 등 외부기관의 감시로는 한계가 있다”며 “각 부처의 기관장들이 엘리트를 감사관으로 임명하고 감사팀에 힘을 실어줘야 조직 부패가 척결된다”고 말했다.

조직 및 기관장에 대한 문책을 우려해 내부 비리를 쉬쉬하는 풍토도 문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성진(延聖鎭)박사는 “98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상관이 부하직원의 부정을 문책하기보다는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지으려 한다’고 말했을 만큼 윤리의식의 이완 현상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 “내부 감찰만 엄격하다 하더라도 부정부패의 많은 부분을 척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대 공공정책학부 박흥식(朴興植)교수는 “조직 부패는 우선 내부에서 부패 관행에 저항하고 그래도 문제 해결이 안될 경우에는 과감하게 외부에 알리는 내부 고발자가 있어야만 척결될 수 있다”며 “내부 고발자를 조직의 배반자로 간주하는 현재의 풍토를 제도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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