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한민족 정서는 한, 일본인의 정서는 허무

입력 2000-12-26 19:51수정 2009-09-21 14:34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우리 민족의 정서를 보통 '한(恨)'이라고들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신명난' 민족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것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일제 강점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이 우리 민족 가슴 깊숙이 박힌 것은 틀림없겠지요.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는 무엇일까요. '허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군대나 도적 떼가 마을을 스윽 지나가고 나면 여기저기서 시체가 나뒹구는 참담한 역사,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전쟁에 한번 지면 칼로 배를 그어야 하는 가혹한 전통, 미국이라는 대국을 이겨보겠다고 버티다 핵 폭탄 두 방에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던 치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 마음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질 법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툭하면 자살하곤 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딴 얘기 잠시 하자면, 일본 사람들 자살 많이 하는 건 희한하다 싶을 지경입니다. 오래 전에 한 여대생이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들은 뒤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전해 듣고 어안이 벙벙했던 적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자살하는 대규모 자살도 꽤나 자주 일어납니다. 이를 가리키는 '잇카 신주(一家 心中)'라는 낱말이 따로 있을 정도니까요. 신주(心中)란 '함께 죽는 것'을 일컫는 말로, 죽기 싫어하는 상대를 억지로 죽이고 자기도 자살할 때(특히 연인들 사이의 情死에서)에는 특별히 '무리 신주(無理 心中)'라고 합니다. 단어가 따로 마련돼 있다는 것은 심심찮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잠시 샛길로 샜습니다만, 아무튼 악착같은 삶을 살다가도 그런 노력들이 하루아침에 '끝장'난다면, 또는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삶에 대해 허무해질 것은 당연하겠지요. 일본 문학이나 다른 예술 작품에서 허무를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일본인들 기질과 당연히 관련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입니다. <은하철도 999>는 아주 유명한 작품이지요. 이 작품, 얼마나 허무합니까? 종착역도 없이 돌아다니는 열차 은하철도 999. 스토리에 커다란 반전이 없음에도 은하철도 999의 '철이'와 메테르(심지어는 로봇 차장까지)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들을 휘감고 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 덕분일 겁니다.

<아키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각기동대>도 <에반게리온>도 모두 이런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이들 애니메이션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다름 아닌 '지옥' 그 자체입니다. 디즈니의 낭만적인 세계관과 완전히 대비되는 이런 일본인들의 비관적인 세계관은 젊은 우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지만, 솔직히 말해 영화 보기를 마친 뒤에는 씁쓸해지기 마련입니다.

최근 개봉된 <인랑>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남아 있건만 오로지 비정함만을 요구하는 <인랑> 속의 세상. 이게 지옥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습니까(시대 배경은 '가상'의 과거이지만 저는 오히려 가까운 미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좀 다릅니다. 12월30일 개봉되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다른 몇 편의 작품들이 황폐화된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허무와 거리가 있습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보자, 하는 게 이 사람 애니메이션의 공통적인 주제입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사실 메시지야 평범한 셈이지요.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들이 위대한 이유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끝간 데 없는 상상력 때문입니다. 상상력과 표현 수단의 개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까요.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웃의 토토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섬 라퓨타>도 그 못지 않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나 <원령공주>도 물론 좋습니다. <붉은 돼지>도 좋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좀 처지는 느낌입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출발점으로 해서 앞으로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작들이 계속 개봉될 예정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드넓은 스크린 위에 펼쳐질 바람 계곡, 파즈와 시타,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 초보 마녀 키키, 그리고 아시타카와 산…. 그야말로 '기대하시라, 개봉박두'입니다.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 660905@hanmail.net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