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칼럼] 한상복 비즈하이파트너/벤처가 언론을 만난들?

  • 입력 2001년 2월 25일 18시 09분


회사 설립 초기 벤처기업의 경영자들을 만나 ‘경제신문 기자 출신’이라고 소개를 하면 대뜸 “그 좋은 곳에서 왜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곧바로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도 신문에 날 수 있겠느냐”는 식의 본론이 이어진다.

이 분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신문에만 나면 ‘유명기업’이 되니까 투자를 받기도 쉽고 마케팅으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반추해보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지난해 코스닥시장이 크게 달아올랐을 때만 해도 신문에 소개되는 기업은 “투자하게 해달라”는 엔젤들의 전화로 몸살을 앓는 것이 통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신문에 나온 기업=유망기업’이라는 등식이 깨진 지 오래다. 투자자들의 심리도 싸늘해졌다. 아무리 매체에 많이 소개돼 유명해진 기업이라도 구체적인 수치(매출, 순익 등의 전망)에 신빙성이 없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일부 벤처기업 경영자들이 아직도 이런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경쟁사나 주위의 벤처기업들이 좋은 조건에 투자를 받거나 대형 계약 실적을 올릴 때마다 ‘매스컴을 잘 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에 만난 벤처 사장이 이런 케이스였다. 인력구성이나 기술면에서 볼품이 없는 경쟁사가 거액의 투자를 받았는데 이것이 미디어에 잘 소개되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며 홍보 담당자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신문에 났다는 것은 세상이 그 업체를 알아주기 때문 아니냐”는게 사장의 논지였다.

이러다 보니 벤처기업의 홍보 담당자들은 죽을 맛이다. 조그맣게나마 회사에 우호적인 기사가 실리도록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홍보 대행사를 수배, 비싼 돈을 들여도 사장의 기대수준에 맞추기에는 역부족이다.

대행사들 역시 ‘건수’를 채우기 위해 온갖 해괴한 재료를 짜낸다. 회사의 영업이나 기술개발 등 본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행사가 급조되고 자료로 만들어져 기자들에게 배포된다.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위한 다양한 ‘쇼’가 연출된다. 시스템 통합업체가 사이버 결혼식을 주관하기도 하고 발렌타인 데이 행사에 인터넷업체 경영진 부인이 동원돼 총각 직원들에게 초콜렛을 전달한다.

상업 미디어는 참신한 아이템을 쫓는 속성을 갖고 있는 만큼, 재미있는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지면에 반영시켜주기도 한다. 미디어의 이런 내막을 아는 홍보 전문가 수십명이 서울 테헤란로 일대를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같은 전시성 홍보가 회사의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깜짝 쇼’는 그 때 뿐이다. 경영자나 홍보 담당자들에게는 ‘흐뭇한 한 건’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으나 대중은 신문을 덮는 순간, 그 회사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대기업이나 초대형 다국적기업의 경우 문화사업 또는 직원들의 기 살리기 차원에서 과감하게 예산을 책정, 과시성 행사를 벌이고 이를 홍보하기도 한다. 그러나 몇 달 앞을 기약할 수 없는 벤처기업들의 험난한 현실을 놓고 보면, 이들이 이런 일에 기력을 낭비할 여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영자의 ‘미디어에 대한 환상’이 직원들을 과잉 홍보 전선으로 내모는 주요인이다. 벤처기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잡지까지 등장한 것도, 한 순간에 유명해지고 싶은 경영자들의 과욕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벤처기업을 소개하는 어떤 월간잡지의 경우, 매달 5~6명의 벤처 기업인을 선정해 상을 주고 있는데 대상자들에게 500권씩 떠넘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업의 존재 이유가 매출을 올려 수익을 냄으로써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라면, 홍보 역시 그 본연의 목적에 맞추어져야 한다. 모든 벤처기업 경영자가 시장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지만, 정작 시장에 기업의 가치와 비전을 전달하는데는 서투른 것 같다.

시장이 기업으로부터 원하는 정보는 멋진 치장이나 유명세가 아니다. 회사의 매출흐름과 기술, 인력구성,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같은 경영정보 외에는 관심이 없다.

기업에 대한 기사가 신문의 귀퉁이에 조그맣게 나오더라도 그 내용이 암시하는 바 크다면, 시장은 마치 귀신처럼 이를 찾아 보고 기민하게 반응을 한다. 성공을 꿈꾸는 벤처 경영자들이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조급증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미디어 출현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은 결코 아니다. 시장은 미디어와는 다른 축에서 움직인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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