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우리는 기계식 교육의 희생자"

  • 입력 2002년 3월 10일 17시 35분


서울대 신입생들이 대학에서 수학강의를 듣고 있다.
서울대 신입생들이 대학에서 수학강의를 듣고 있다.
올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A군은 최근 대학에서 치른 수학평가시험에서 떨어져 정규 수학 과정 대신 ‘기초 수학’부터 듣게 됐다. A군은 수능 모의고사에서 1개 정도 틀리는 실력에 전교에서 1, 2등도 곧잘 했던 우등생. A군은 지금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내 꼴이 이게 뭐냐”라고 한탄하는 등 크게 충격을 받았다.

캡션

서울대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수학평가시험 결과가 최근 공개되면서 고교생의 ‘기초학력 저하’문제가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서울대 수학과 교수들은 개강 이후 아직 수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적이 없어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평가시험의 단답형 문제는 꽤 쉬웠는데도 탈락자가 작년보다 2배로 늘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계승혁 교수(수학과)는 “지난해 수학 강의에서 신입생들은 너무 진도가 빠르고 어렵다고 항의하고, 복학생은 오히려 과거보다 쉽다며 신입생을 나무랐다”며 올해도 이런 현상이 반복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서울대는 물리학과에서도 올해부터 기초물리반을 따로 개설하는 등 수준에 따른 학습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서울대 신입생들은 교수들의 ‘기초학력 부족’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했다.

권기욱군(공대1)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두 살 위의 형과 비교하면 지금은 공부의 양이 적고 질도 매우 낮다”며 “학교에서도 수능 유형에 맞게 문제 푸는 법만 배우지 원리나 개념은 거의 배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소영양(자연대1)은 “서울대에 온 학생이라면 학교에서 하라는 것 이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며 “평준화 정책을 폈으면 그에 맞는 학생을 기대해야지 지금 와서 우리보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느냐”며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매도하는 분위기에 항변했다. 자신들은 문제풀이를 반복하는 기계식 교육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교수들도 학력 저하 현상이 학생들 탓이 아니라 잘못된 입시 제도와 교육방식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학원이다 과외다 하면서 공부는 많이 시키지만 모두 ‘헛공부’라는 것이다.

김명환 교수(수학과)는 “현재 수능은 쉬운 것을 안 틀리는 학생이 절대 유리한 제도”라며 “비슷한 문제만 되푸는 현재의 교육은 겉으로는 죽자고 공부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공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김홍종 교수(수학과)는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자세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며 “현재의 입시 제도가 학생들의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도록 조장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요령 위주의 현 수능 제도가 달라져야만 기초학력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김명환 교수는 “400점 만점인 수능 점수를 확 늘려 공부 잘하는 학생과 평범한 학생을 모두 변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며 “지나치게 많은 시험과목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준 서울대 총장이 7일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합격시키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등 명문대 중심으로 기초학력에 대한 검증이 앞으로 입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학도 기초반 등으로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높았다. 김성기 교수는 “지난해 기초수학을 듣고 정규과정에 합류한 학생들 중 A학점도 나오고 90% 이상이 C학점 이상을 받는 등 대학 생활에 잘 적응했다”고 밝혔다. 이승한군(공대1)도 “실력을 보충할 수 있는 기초반이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계승혁 교수는 “한국 고등학생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고 하지만 세계 일류 대학의 학생들은 우리와 비교해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며 “한국의 과학기술을 이끌어갈 학생들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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