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를 보라… 인류 구원의 약속으로 그 무겁디 무거운 몸을[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7일 23시 09분


〈110〉 예술 속 ‘아기 예수’ 이미지
유럽에 뿌리박힌 아기 예수 모습… 탄생화, 성모자상 등으로 확산돼
인간은 욕망의 굴레에 갇힌 존재… 인간 아기-구세주의 갈림길 시작
탄생 순간 ‘세상의 짐’ 진 존재로… 예수 형상은 인류 구원 서사 담아

❶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1480∼1532)의 ‘아기 예수’. ❷ 독일 조각가 레온하르트 케른(1588∼1662)의 ‘잠자는 아이’. 루이니와 케른의 두 그림은 각각 구세주 아기와 인간 아기를 표현했다. 사진 출처 위키아트·위키미디어
❶ 이탈리아 화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1480∼1532)의 ‘아기 예수’. ❷ 독일 조각가 레온하르트 케른(1588∼1662)의 ‘잠자는 아이’. 루이니와 케른의 두 그림은 각각 구세주 아기와 인간 아기를 표현했다. 사진 출처 위키아트·위키미디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가장 어린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장르화는 물론 예수탄생화다. 현 팔레스타인 지역인 베들레헴으로 동방박사 세 사람이 황금, 유향, 몰약을 들고 ‘유대인의 왕’이 될 이의 탄생에 맞춰 온다.“유대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신약성서 마태오 2, 1-11)》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예수는 어쩌다 태어나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구세주가 된 인물이 아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미리 고지했듯, 이 아기는 구세주가 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다. 예수의 신성을 전혀 믿지 않았던 고대 유럽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웃었다. 하느님의 아들이기는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들이겠지! 성령으로 잉태하기는커녕 간통을 통해 태어났겠지! 십자가에 못박히다니, 범죄자의 수치스러운 종말이겠지!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형틀이겠지!

이러한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유럽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구세주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전근대 그림을 소장한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가도 아기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리아와 함께한 성모자상이 대표적이다. 성모자상은 미술관뿐 아니라 제법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 중소도시 곳곳의 건물이나 길모퉁이에도 새겨져 있다. 일상에서 늘 경배의 대상을 찾던 그리스도교 문화의 흔적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1485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1485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성모상이나 예수탄생화 버금가게 흔한 장르화가 여행자의 수호성인 크리스토퍼 그림이다. 전승에 따르면, 크리스토퍼는 힘센 거인이어서 사람들을 어깨에 싣고 물살이 거센 강을 건네주곤 했다. 그가 여느 때처럼 한 아이를 어깨에 태우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인도 힘겨워할 만큼 아이는 무거웠다. 가까스로 강 건너편에 이르고 나서야 그 아이가 바로 예수였음을 알게 됐다. 연약한 아이의 모습을 한 예수가 왜 그토록 무거웠을까? 그 아이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 크리스토퍼 장르화 속 예수는 지구(이 세상)를 손에 들고 있고, 크리스토퍼는 힘겨워 울상인 경우가 많다.

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단순히 아픈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굶주린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만연한 부도덕을 일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굴레가 무엇이냐고? 그것은 욕망을 좇으며 안달복달하다가 결국 죽고 마는 인간의 삶 그 자체다. 그 점은 17세기에 활약한 독일 조각가 레온하르트 케른이 묘사한 (구세주 아기가 아닌) 인간 아기의 모습에 드러나 있다.

아이들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가 또 어디 있는가. 천하장사도 연일 육아를 하다 보면 지쳐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불꽃도 결국에는 꺼지고 만다. 그래서 여기 잠든 인간 아기는 횃불을 떨구고 있다. 그 아이가 기대고 있는 해골은 생명의 불꽃이 꺼진 상태인 죽음을 나타낸다. 왜 이처럼 죽어야 하냐고?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골 밑에 놓인 모래시계는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사멸해 나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잠든 아이의 머리에는 월계관이 씌워져 있다. 이 아이는 욕망을 좇으며 안달복달하다가, 운좋게도 경쟁의 승리자가 되는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승리의 영광도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죽어도 영광은 계속되지 않느냐고? 죽은 사람에게 그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람.

케른의 이 조각은 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예술’의 일종이다. 바니타스 예술은 인생의 덧없음을 정면으로 다룬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세속적 추구는 헛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는 경우가 많다. 죽음은 노인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니타스 예술에는 아름다운 여인 혹은 귀여운 아기가 등장하곤 한다. 이 아기와 아기 예수의 비교야말로 인간과 구세주의 차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16세기에 활약한 이탈리아 예술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아기 예수 그림을 보자. 옆에는 뱀이, 밑에는 먹다 남은 사과가 놓여 있다. 뱀과 사과는 인간의 원죄를 나타낸다.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순진무구하게 살던 아담과 이브는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게 된다. 루이니 그림 속의 선악과를 보라. 누군가 베어먹은 자국이 선연하다. 이런! 인간은 이미 원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제 인류는 자력으로는 그 원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신없이 욕망하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동하고, 그러다가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차례로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가리킨다. 이는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이미 알고 있으며, 장차 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감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으로 인해 예수 이미지는 재난과 불행으로 가득찬 인류 역사와 함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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