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문화

[O2/Life]안지훈의 빈티지 특강

입력 2011-06-04 03:00업데이트 2011-08-29 17:02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빈티지, 삶-추억-문화가 깃든 생명체를 만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빈티지 상점에서 만난 1930년대 에나멜웨어 촛대들. 안지훈 씨 제공
언젠가부터 우리 주위에서는 구제(舊製), ‘빈티지(vintage)’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그러나 습관처럼 사용할 뿐, 무엇이 빈티지인지 사람들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막연하게 오래된 물건, 혹은 누군가 사용하던 낡은 무엇으로 연상하는 사람도 많다.

와인 애호가들은 빈티지라는 표현에 친숙하다. 와인 숙성고에서는 포도를 수확한 뒤 숙성시킬 때 오크통마다 연도를 표시한다. 나중에 병에도 표기되는 이 연도를 빈티지라고 부른다.

요즘 쓰이는 빈티지라는 용어는 생산연도뿐 아니라, 그 물건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보증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구하기 어려운, 소장가치가 있는 희소한 제품’이라는 뜻이 더해지기도 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빈티지라는 용어가 가장 자주 쓰이는 분야는 패션이다. 개성 강하고 취향 독특한 젊은이들이 주로 열광한다는 빈티지 패션이란 정확하게 말해 192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을 말한다.

오리지널이 아닌 전 시대의 빈티지 의상을 모방한 제품들은 빈티지가 아닌 ‘회고하는’의 뜻인 레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를 줄여 레트로(retro)라고 부른다. 빈티지를 ‘중고품’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틀린 표현이다.

권위 있는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서는 빈티지를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미적 가치와 우월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빈티지는 ‘앤티크(antique)’와도 구분된다. 이 둘을 구분 짓는 기준은 시간이다. 앤티크는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것이어야 한다는 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됐다고 해서 앤티크 제품이 빈티지보다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20세기에 등장한 수많은 빈티지 제품들이 사회에 일으킨 반향은 앤티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예를 들어 브로이어 바우하우스 의자(Breuer Bauhaus Chair)와 같이 20세기에 들어서 제작되었던 빈티지 가구들은 미국과 유럽사회에서 새로운 유행을 일으키거나 혁신적인 문화적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졌다.

○ 생활 속의 빈티지, 빈티지 문화의 탄생

빈티지 문화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자녀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집을 떠나 독립한다. 보통 대학에 입학하는 18세가 되면 부모의 집을 떠나는데 이때 부모들이 도움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스스로 집을 구하고 생활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자녀들은 자취방을 구해 집을 나오면서 부모님이나 할머니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집안 다락에 방치돼 있던 칠 벗겨진 나무의자, 부엌 찬장에 숨어 있던 낡은 냄비 등으로 살림살이를 꾸리고 부족한 것은 동네 벼룩시장에서 찾는다. 이때 그들의 살림살이에는 어머니, 할머니,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내다 판 사람들의 가치와 혼(魂)이 함께 오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 낡은 물건들을 나눠 사용하며 오래된 물건들의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야말로 빈티지 문화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의 옥스팜(Oxfam)이나 유럽 각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적십자사의 중고 상점들에서부터 주말마다 열리는 수백 개의 벼룩시장에 이르기까지 형태는 다양하지만 본래 주인들의 관심에서 조금은 멀어진 낡은 물건들의 숨은 가치를 찾아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원리는 같다.

○ 빈티지 제품들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까?


프랑스 파리의 ‘방브 벼룩시장’. 책, 인테리어 소품, 가구, 옷등 품목별로 구역이 나뉘어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필자에게 빈티지 제품의 관리법을 묻곤 한다. 특히 가구에 대한 질문이 많다.

수십 년 세월을 버텨오면서 칠이 벗겨지고 광택을 잃은 가구를 보면 빈티지 애호가라면 누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가구의 벗겨진 부분에 목공용 페인트를 붓으로 칠하거나 동네 문구점에서 니스를 구입해 바르는 경우가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순간 빈티지 가구의 오리지널리티와 가치는 고스란히 날아가 버린다. 페인트나 공업용 니스가 다시 벗겨질 경우 가구의 나무 표면이 한 차례 더 손상되기 때문에 다시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가구의 상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연히 오랜 세월을 사용하다 보면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긴다. 모퉁이 찍힌 자국에 자주 이사 다닌 기억이 숨어 있고 와인을 흘린 자국에는 아내와 분위기를 내며 한잔하던 추억이 배어 있다. 가구뿐만 아니라 어느 물건이든 사람의 손이 많이 닿았던 부분은 거뭇한 때와 함께 그 사람의 삶이 묻어 있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파티나(patina)’라고 부른다. 그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생긴 시간의 흔적이다. 파티나는 깨끗하게 닦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물의 가치를 더 높게 만들어주기 위한 보증서와 같은 것이다.

가구의 파티나를 최대한 살리면서 제품을 깨끗하게 보관하기 위해 시중에 나와 있는 광택제나 보호크림을 1년에 한 번 정도 사용하는 것도 좋다.

평소에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 소개한다. 30년 이상 고가구를 취급해 온 전문상인에게 직접 들은 방법인데, 우선 껍질을 깐 잣을 구입해 20∼30개를 삼베나 광목 한 겹으로 단단하게 잘 싼다. 그리고 윗부분을 고무줄이나 끈으로 머리카락을 위로 묶을 때처럼 팽팽하게 묶은 뒤 잣이 모여 있는 부분을 망치 등으로 가볍게 두드려 잣의 기름이 배어 나오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고 목가구의 표면을 가볍게 돌려가며 닦으면 된다. 자연스럽게 잣기름이 나무 표면에 스며든 뒤 마르고 나면 끈적거리지도 않는다. 이렇게 몇 주에 한 번씩만 닦아주면 파티나가 살아 있으면서도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가구를 가질 수 있다.

○ 건강한 빈티지 문화를 위한 상인들의 역할

안지훈 9년 동안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경험 마케팅과 디자인(brand experience marketing & design) 전문회사인 Plus X에서 책임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블로그 ‘스칸디나비안 빈티지 팩토리’(www.scandinavianvintage.co.kr)를 통해 북유럽에서 만났던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건강한 빈티지 문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하는 소비자들의 애정 못지않게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역할이 중요한 만큼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다.

서울 이태원만 해도 빈티지 혹은 앤티크 가구와 소품을 판매한다는 간판을 걸고 장사하는 업자가 제법 많다. 그러나 막상 가게에 들어가서 보면 오리지널 제품이 아닌 정체불명의 모방품이 진열돼 있는 경우가 예상외로 많다. 하지만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묻기 전까지 주인들은 웬만해서는 오리지널 제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는다.

초보 수집가들이나 주부들은 제품의 진위도 모른 채 적지 않은 금액을 이들에게 지불하고 물건을 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것이 오리지널 제품인지 혹은 모방이나 재현을 한 제품인지는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서 판단할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에게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명시해야 할 책임이 있고 그 이후 판단이 소비자의 몫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인들도 자신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엄격한 법적 기준도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오래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모인 협회 등에서는 이권 관리나 권리의 주장에 앞서 자체적으로 제품의 진품 여부를 관리하고 규제할 강한 내부규정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최신기사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