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 ⑨]구한말 멕시코 한인이주

입력 1998-03-10 19:01수정 2009-09-2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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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동부해안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천혜의 휴양지.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이미 낯익은 캉쿤 등 명소는 투명한 쪽빛 바다물결이 넘실거리는 드넓은 해안선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인근에는 마야문명의 각종 유적이 곳곳에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낭만의 신천지’를 꿈꾸었던 한인들은 20세기초 이 곳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들이 그리던 ‘이상향(理想鄕)’이 아니었다.

1905년3월6일 제물포항(지금의 인천)을 떠난 한인 1천33명(남자 8백2명, 어린이들과 부녀자 2백31명)은 미지의 세계인 멕시코로 향했다. 당시는 중남미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파나마 운하가 뚫리기 전이어서 남미대륙 끝을 돌아야 하는 장장 75일간의 ‘대항해’였다.

이들 대부분은 하와이 이민자처럼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이민 전단에 솔깃해 힘든 바닷길을 참을 수 있었다. 이중 구한말 일제의 폭압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삼은 정부 관리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이 기나긴 항해끝에 도착한 곳은 멕시코동부 유카탄반도의 베라크루스항. 곧이어 이들은 인접한 메리다지역 등에 집중되어 있는 22개 농장에 분산 수용된다.

멕시코 한인이주는 1902∼1903년 하와이 한인 이주의 성공으로 불길이 당겨진다. 하와이 한인 이주소식을 전해들은 멕시코 농장주들은 다각적인 채널로 한인노동력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해양업이 호황기를 구가하자 멕시코 농장주는 선박에 쓰이는 각종 로프의 주원료인 ‘애니깽’ 생산을 다그치기 위한 노동력이 절실했던 것.

멕시코 한인 1세대들 일부는 사탕수수 농장이나 광산, 시멘트공장에도 진출했지만 주로 ‘애니깽’농장에 배치됐다.

그러나 멕시코 이주는 하와이때와 달랐다. 한인들은 ‘4년간의 계약노동은 자유노동이나 다름없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들이 접한 현실은 냉혹했다. 그만큼 이들의 대우는 열악했다. 언어도 몰랐으며 생활풍습도 달라 어디 호소할 데도 없었다.

유카탄반도에 한인들이 이민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인삼을 팔러온 인삼장수 박영순(朴泳淳)씨는 이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국 정부와 하와이 한인회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곳에 이민온 동포들은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고, 밤이면 토굴에 들어가 밤을 지새며 매일 품값으로 35전씩 받으니 의복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할 뿐으로 그 처지가 농장주인의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1905년11월17일 북미한인공립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농장에 매인 멕시코 한인1세대의 초기 생활은 박영순의 편지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애환은 ‘애니깽’에 압축적으로 배어 있다.

‘애니깽’은 높이 1∼1.5m, 너비 30∼40㎝의 잎사귀를 가진 선인장의 일종으로 한 나무에 보통 50∼1백개정도의 잎이 뭉쳐 있다. 애니깽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으면 튼튼한 로프가 되는 것이다.

‘애니깽’농장일은 이 잎을 잘라서 다발로 묶은뒤 가공공장에 옮기는 것이다. 애니깽 농장일을 마치 가을걷이 정도로 생각한 한인들은 수많은 ‘애니깽’ 가시에 찔리며 한많은 삶을 되씹었으리라.

메리다주에 살고 있는 한인2세인 텔마 할머니(78)는 “당시에 어린아이들도 농장에 따라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며 “하루 평균 5천∼6천개의 애니깽 잎을 따서 날랐는데 25개를 1다발로 묶어서 엮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가시에 많이 찔렸을 때 제대로 된 약이 없어 응급조치로 담배나무 액즙을 발라 피를 멎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머니는 전했다.

계약기간이 끝나자 멕시코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일부는 미국 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일부는 쿠바까지 흘러들어갔다.

좁은 울타리에 맴돌았던 멕시코 한인사회가 확산되는 전환기도 이 무렵이었다.

69년 작고한 이순녀(李順汝·작고당시 77세)씨는 농장일을 벗어나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멕시코 시티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장기철(張箕哲·60)씨는 장인인 이씨가 메리다에서 4년간 농장일을 마친 뒤 12세때 멕시코 시티로 건너왔다고 회고했다. 처음에 조그만 시계수리방을 열었던 장인은 신용을 쌓으며 가게를 확장, 나중에 보석상 ‘라 코리아나’를 차렸다. 이 가게는 시내에서 몇 손가락을 꼽을 정도의 명물이 됐다는 것이다.

장씨는 “장인은 노동자로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으며 농장에서 노예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아주 엄격한 식사예절 등 한국적 풍습은 그대로 간직하셨던 분”이라고 전했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멕시코 한인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리적 울분과 함께 멕시코 한인들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도록 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멕시코 한인들은 대한국민회 북미총회를 통해 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으며 3·1절에는 지역 교민회별로 축제를 갖고 민족의식을 다지기도 했다.

멕시코 한인1세대의 후예는 멕시코 시티에 2천5백여명, 멕시코 전체로 1만여명에 달하지만 이제 순수한 한인 혈통은 보기 드문 상태다.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한인1세대인 고흥룡할아버지(93·메리다거주)는 지금까지 한국말을 잊지 않고 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고옹은 “노인들이 청년들에게 당시 한인들의 문화를 전하려고 해도 말이 통해야지…. 한인회관도 문이 닫힌지 오래됐고 말이야”라고 아쉬워했다.

한편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메리다 한인회장인 울리세스 박씨는 “현재 한인 4,5세들은 신문에 월드컵 등에서 한국관련 기사가 났을 때 큰 관심을 가지며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계약기간이 끝나자 멕시코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일부는 미국 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일부는 쿠바까지 흘러들어갔다.

좁은 울타리에 맴돌았던 멕시코 한인사회가 확산되는 전환기도 이 무렵이었다.

69년 작고한 이순녀(李順汝·작고당시 77세)씨는 농장일을 벗어나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멕시코 시티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장기철(張箕哲·60)씨는 장인인 이씨가 메리다에서 4년간 농장일을 마친 뒤 12세때 멕시코 시티로 건너왔다고 회고했다. 처음에 조그만 시계수리방을 열었던 장인은 신용을 쌓으며 가게를 확장, 나중에 보석상 ‘라 코리아나’를 차렸다. 이 가게는 시내에서 몇 손가락을 꼽을 정도의 명물이 됐다는 것이다.

장씨는 “장인은 노동자로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으며 농장에서 노예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아주 엄격한 식사예절 등 한국적 풍습은 그대로 간직하셨던 분”이라고 전했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멕시코 한인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리적 울분과 함께 멕시코 한인들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도록 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멕시코 한인들은 대한국민회 북미총회를 통해 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으며 3·1절에는 지역 교민회별로 축제를 갖고 민족의식을 다지기도 했다.

멕시코 한인1세대의 후예는 멕시코 시티에 2천5백여명, 멕시코 전체로 1만여명에 달하지만 이제 순수한 한인 혈통은 보기 드문 상태다.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한인1세대인 고흥룡할아버지(93·메리다거주)는 지금까지 한국말을 잊지 않고 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고옹은 “노인들이 청년들에게 당시 한인들의 문화를 전하려고 해도 말이 통해야지…. 한인회관도 문이 닫힌지 오래됐고 말이야”라고 아쉬워했다.

한편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메리다 한인회장인 울리세스 박씨는 “현재 한인 4,5세들은 신문에 월드컵 등에서 한국관련 기사가 났을 때 큰 관심을 가지며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멕시코시티·메리다(멕시코)〓정연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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