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의 세상읽기]『나 예민한 사람이야』

  • 입력 1997년 7월 26일 08시 14분


어느 TV연속극 속에서 한 남편이 아내에게 걸핏하면 이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앞의 「나」와 끝의 「야」자의 억양을 약간 들어올리면서…. 작가는 자기를 알아서 모시고 떠받들어 달라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남자의 「왕자병」증세를 그렸던 것. 어린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나」라는 주어로 시작된다. 『나 배고파』 『나 뭐 사줘』 『나 이거 먹을래』 이렇게 자기의 욕구를 직접 표현하여 충족시킨다. 이런 경우엔 욕구도 작고 남의 욕구와 상충되지 않으며 자기를 낳은 엄마가 해결사이니까 간단하게 충족된다. 그러다가 아이는 이 세상에 엄마와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친구와 수많은 「남」이 함께 산다는 것을 알면서 대화의 주어를 2인칭, 3인칭으로 바꾸어간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자기 아내에게 옛날에 자기 엄마에게 하던 식으로 주어가 「나」인 대사로 욕구를 해결하려는 남자들이 아직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자기가 정신적인 유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대는 핑계가 『나 예민한 사람이야』 『나 ××는 못 참는 사람이야』다. 「까다로울수록 대접받는다」는 남편의 시대는 지나가고 대접은 커녕 간 큰 남자로 찍혀 버림받는 지금, 각각 따로 자란 「왕자」와 「공주」가 서로 「나」만 주장하면 결국엔 어떻게 될까. 왕자가 이길까, 공주가 이길까. 답, 궁전만 박살난다. 사이좋은 부부는 2인칭 주어의 대사를 많이 쓴다. 『당신 먹었어?』 『자기 이거 좋아?』 『당신 고단하지?』 이렇게…. 「나 예민한사람」이아니고 「당신이예민해질까봐」 조심하고 신경쓴다. 가정은이제 이런 사람들에의해유지되고 이런 사람들의슬하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가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나 밖은 여전히 「나 예민한 사람들」로 넘친다. 길에서는 『나 바쁜 사람이야. 먼저 가야 돼』 식당에서는 『나 배고프면 못참는 사람이야. 먼저 먹어야 돼』 「싫고 좋고가 분명한」 「예민한 어른들」의 어리광을 누가 받아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괘씸하게끔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서 「열 받은」 사람들로 여름 뙤약볕의 도심이 넘쳐난다. 특히 자동차문제로 번지는 욕설 신경질 폭력…. 성질대로 못하는 둔한 어른도 있기에 망정이지 이러다 하수구마다 피로 물들어 한강이 빨갛게 되지 않을까. 한여름에 원고 쓰다, 나, 더위 먹었나? 최연지<방송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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