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의 세상읽기]재미없는 집의 「주부노릇」

  • 입력 1997년 6월 7일 09시 15분


대학 2학년인 딸아이는 남편보다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다. 문을 열어주는 엄마에게 『다녀 왔습니다』라고 공손하게, 그러나 눈도 맞추지 않는 건성의 인사 한마디를 하고는 귀에 꽂은 워크맨 리시버를 빼면서 곧장 찾는 것이 전화통. 무선전화기를 떼어 가지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때부터 집전화는 통화중 상태로 들어간다. 학교에서 집에까지 오는 동안 받은 삐삐(무선호출) 메시지를 체크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몸뚱이만 집에 들어 왔을뿐 신경안테나는 여전히 밖을 향해 있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열려진 딸아이의 방문 사이로 친구와 전화로 얘기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 남편이 『쟤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우리한테 보여준 적이 없잖아』 한다. 나의 대답은 서글픈 긍정과 분함이 섞인 『흥!』이다. 문득 고색창연한 가락의 「홈 스위트 홈」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즈을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 뿐이리…』 아니, 잠깐!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는데」 어느 누가 집구석(?)에 들어 가겠는가. 밖에서 놀던 아이가 더 이상 불러주는데도, 불러낼데도 없을때 『쩟, 집에나 가지 뭐』하지 않겠는가. 남자들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말이야 그렇다고 하지 않지만) 「껀수」 찾아 밖으로 빙빙도는 것을 직장생활하면서 꽤 많이 보지 않았던가. 언제부터 집이 「편안하게 쉴 곳」이긴 하지만 「재미는 되게 없는 곳」이 되었을까. 생각컨데 집이란 곳이 식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소위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아이 노릇」 「학생 노릇」 등 이런 역할이란 것이 일종의 의무로 부과되기 때문에 재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 재미없는 집에 가장 많은 시간 몸 담고있는 주부는 무엇인가. 식구들이 재미없어하는 집을 지키고 각자의 역할을 알려주고, 공짜식사를 준비하는 「주부 노릇」은 뭐 재미있어 하는 줄 아는가? 학생시절, 학교나 학원에서 땡땡이칠 때 선생님은 몹시 수업을 「하고 싶어」 하시는 걸로 알았다. 어른이 되어 잠시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 휴강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을 보며 그때의 오해가 생각나 속으로 깔깔 웃었다. 집에 있는 아내나 어머니가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집이 재미있는 곳이 된다. 「우울증 주부 자살」. 어떤 정신병자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최연지 〈방송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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